언젠가부터 개츠비를 떠올릴 때마다 「젤리빈」의 주인공 짐을 떠올리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된 건 「젤리빈」을 읽고서였다. 「젤리빈」을 읽기 전에는 개츠비는 개츠비로만 존재했다. 그런데 짐을 만난 순간 위대하지 않아도 좋았을 또 다른 개츠비를 어김없이 상상하게 되었다.
개츠비와 짐은 미국의 대표적인 현대작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가 창조한 인물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개츠비는 장편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이다. 반면 짐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 「젤리빈」의 주인공이다.
「젤리빈」은 단편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중 두 번째에 실린 작품이다. 여기서 '두 번째'라는 단어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표제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첫 번째에 실려 있어서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화려한 영상미를 자랑했던 영화 탓인지 활자로 읽었을 때에는 꽤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조금 과장하자면 흡사 다큐멘터리 같았다고나 할까. 그러다 각주가 달린 「젤리빈」의 첫 문장과 마주했다.
"짐 파월은 젤리빈이었다."
각주는 '젤리빈'에 달렸는데 '젤리빈'은 내세울 것 없는 한량을 뜻하는 속어로, 미국에서는 1920년대 이후 흔하게 쓰인 말이라고 한다. 강낭콩 모양의 알록달록한 사탕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젤리빈'이라는 단어에 다른 뜻이 있다는 사실은 이 소설을 읽고서야 알았다. 덕분에 '젤리빈'의 역사에 대해서도 찾아 훑었는데 소설이 좋았던 것은 딱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다음에 마주한 문장 덕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쩐지 이 말은 모자에 가지각색 잎사귀며 야채가 무성하게 돋아난, 둥글고 먹음직스런 얼굴을 가진 사내를 눈앞에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짐은 호리호리하고 비리비리한데다 당구대에 하도 엎어져 있어서 허리까지 구부정했고, 사람 차별이 없는 북부에서라면 '깡백수'라 불려 마땅한 인물이었다. 젤리빈은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을 두루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빈둥거렸다, 나는 빈둥거린다, 나는 빈둥거릴 것이다, 와 같이 일인칭 단수 형태로 빈둥거리기 위해 동사를 활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합을 통칭했다."
문장을 읽는 순간 짐 파월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패기와 열정 대신 일찌감치 권태를 받아들인 젊은이. 소설 속 문장을 읽으며 피츠제럴드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묘한 나른함에 매료되었다고나 할까. 소설은 그런 나른함을 담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짐은 한때 부유했으나 이제는 몰락한 집안의 후손이다. 그는 "네 여자와 노인 하나가 죽치고 앉아 여름이 가고 또 여름이 올 때까지, 파월 집안이 원래 얼마나 많은 땅을 갖고 있었으며 다음에는 무슨 꽃이 필 차례라는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주절거리는 자기 집을 증오"한다. 그러한 증오는 그를 무기력하고 수줍음 많은 젊은이로 만든다. 짐이 열정적일 때는 주사위로 도박을 할 때뿐이다. 주사위는 그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남녀의 애정과 물질적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전부라고 밝혔던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에서도 남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여자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그녀의 이름은 '낸시'. 그녀 역시 개츠비의 연인 데이지만큼이나 파티를 즐기고 즉흥적인 감성으로 충만한 인물이다. 낸시가 참여하는 파티에 초대된 날, 짐은 낸시를 위해 도박에 나선다. 그리고 승리한다. 낸시의 입맞춤을 받으며 사랑에 취하는 짐.
"젤리빈이 정비소에 들어올 때 회색이던 동쪽 하늘은, 그가 하나밖에 없는 등을 켰을 때는 짙고 선명한 파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등불을 다시 끄고 창문으로 가서 팔꿈치를 창턱에 걸친 채 깊어가는 아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감정이 깨어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허망함, 자신의 삶이 완전히 회색빛이라는 사실에 느끼는 둔탁한 아픔이었다. 주위에서 갑자기 벽이 솟아올라 그를 에워쌌다. 그의 텅 빈 방의 하얀 벽만큼이나 분명하고,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실체가 뚜렷한 벽. 이 벽의 존재를 깨닫게 되자 지금까지는 존재의 낭만이었던 것들, 그러니까 격의 없는 태도라든가 낙천적인 무대책의 기질, 기적적으로 넉넉히 열려 있던 인생 같은 것들이 스르르 빛을 잃었다. 나른한 노래를 웅얼거리며 잭슨 스트리트를 어슬렁대던 젤리빈, 모르는 가게와 노점상이 없고 가벼운 인사와 우스갯소리에 만족하며 그저 슬프니까, 혹은 세월이 흐르니까라는 이유로 가끔 울적해하던 젤리빈, 그 젤리빈은 불현듯 사라져버렸다. 그 이름 자체가 비난이었다. 하찮고 하찮았다."
파티에서 낸시를 위해 속임수를 써가며 주사위 놀이(크랩스)에서 승자가 되었던 짐은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고 수치심을 느낀다. 수치심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짐은 낸시와의 사랑을 위해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이내 꺾이고 만다. 낸시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겨우 살아나던 사회적 야망에 대한 그의 의지는 이내 사그라들고 결국 짐은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나른하고 권태롭지만 위안으로 가득한 자신의 일상으로.
"세시의 거리는 뜨거웠고 네시엔 더 뜨거워졌다. 4월의 먼지는 태양을 그물로 잡아두었다가, 영겁과도 같은 오후마다 되풀이하는 낡은 농담거리 삼아 다시 세상에 퍼뜨릴 태세였다. 하지만 네시 반이 되면 고요의 첫 번째 층이 드리워졌고, 차양과 잎사귀 무성한 나무들 아래로는 그림자가 길어졌다. 이런 열기 속에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인생은 모두 날씨였다. 세상 어떤 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뜨거움을 거쳐, 지친 이마에 갖다 대는 여자의 손처럼 부드럽고 위안이 되는 서늘함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 조지아에는 어떤 느낌이 있다. 뚜렷하게 형용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이것이 남부 최고의 지혜라는 느낌이. 그래서 잠시 후 젤리빈은 잭슨 스트리트의 당구장에 나타났다. 오래된 농담을 지껄이는 마음 맞는 무리들, 아는 사람들을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그곳에."
데이지가 결혼을 했음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던 개츠비에 반해 짐은 낸시의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일상으로 돌아간다. 짐이 그랬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가 개츠비보다는 좀 더 도덕적인 성향을 가졌던 때문은 아닐까. 수치심은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고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니까. 야망을 키웠기에 어떠한 도덕에도 눈 돌리지 않았던 개츠비와 야망을 키울 수 없었기에 위안을 찾아 헤매는 짐. 극단의 두 사람을 보며 극단의 삶을 살았던 피츠제럴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된 조지아 주 탈러튼이라는 소도시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소설 속 짐 파월은 작가로 성공하여 명성과 부를 가졌음에도 끝없이 무절제에 시달리며 생계에 허덕여야 했던 피츠제럴드가 잠시 휴식에 젖은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피츠제럴드는 '젤리빈'이라는 이름을 통해 위대하지 않아도 좋았을 또 다른 자신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구부정한 허리의 짐을 떠올리며 생각해 본다.
단편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는 각각의 단편에 얽힌 짤막한 논평이 실려 있다. 이 논평은 원본 책자의 초판 차례에서 언급한 것인데, 작품을 쓰게 된 계기와 출판하게 된 내력 등 다양한 뒷이야기들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피츠제럴드는 이 논평에서 「젤리빈」이 공저자와 작업한 첫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 공저자는 다름 아닌 그의 아내 젤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