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지윤서 Mar 25. 2022

'그'의 사랑

영화 <그녀(Her)>를 보고

일이 휴지기에 접어든 요즘,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즐겨 보고 있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그녀>. 영화는 놀라웠다. 10여 년 전 영화(우리나라에서는 2014년, 2019년 두 차례 개봉되었다.)임에도 소리를 문자로 기록하는 컴퓨터와 인공지능, 그리고 메타버스를 선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토리도 단순한 멜로드라마라고 치부하기에는 상당히 철학적이었다.




영화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의 얼굴을 화면 가득 잡으며 시작한다. 누구에게 고백하고 있는 걸까. 궁금증이 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것은 그의 사랑이 아니다. 고객의 사랑이다. 그는 편지 대필 작가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사실을 바탕으로 감성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그의 편지는 고객에게도 동료에게도 인기가 높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객의 이야기일 뿐이다. 타인의 사연과 이야기에는 충실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사연과 이야기에는 소홀한 남자. 주인공 테오도르는 그런 인물이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호기심에 인공지능 운영체제(OS)와의 만남을 시작한다. '아기 이름 짓기' 책에 있는 18만 개의 이름을 0.02초 만에 훑어보고 스스로 이름을 지어낼 줄 아는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가 그 대상이다. 사만다와의 만남은 침체된 그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모든 정보를 파악하고 적절하게 관리해줄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에 섬세하게 반응한다. 그는 곧 사만다에게 중독되고 만다. 자신의 고객이 그의 편지에 중독된 것처럼. 결국 사만다를 사랑하게 되는 테오도르. 하지만 그의 사랑은 누구를 향한 사랑일까.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빠져들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만다가 자신에게 최적화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이 실재한다는 사실에 테오도르는 천국을 맛본다. 하지만 사만다는 그 누구에게라도 최적화가 가능한 OS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가 사랑했던 건 사만다가 아니라 또 다른 테오도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육체를 갈망하고 프로그램을 확장하며 진화해나가는 사만다의 변화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망각의 대가는 혹독하다. 하지만 '세상에 헛된 것은 없다'는 <우주전쟁>의 대사처럼 그가 치른 대가도 헛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혼한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 분)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힘들어했는지 끝끝내 공감하지 못했을 테니까.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는 인간의 고유성. 그 고유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사랑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 그런 의미에서 이동진의 영화평은 그 어떤 영화평보다 마음에 와닿았다. "대상(Her)이 주체(She)가 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어른의 사랑".


영화는 주인공 테오도르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독백으로 끝난다. 하지만 독백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왜 그렇지 않을까. 처음의 독백이 고객을 향한 것이었다면 마지막의 독백은 이혼한 아내를 향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다 본 뒤 첫 장면과 끝 장면을 다시 떠올려본다면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랑의 성장. 이제 그는 사랑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울음을 잠재우는 지평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