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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Dec 28. 2022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멜로 영화라고?

소녀의 심미안과 그것을 알아챈 화가의 가르침을 엿보는 맛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전적으로 지인이 그린 동명의 그림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3년은 그냥 가" (brunch.co.kr)을 선물로 주었던 지인은 동네 문화원에서 여전히 유화를 배우는 중이다. 얼마 전, 그 문화원에서 한 학기 수업을 마감하며 전시회를 열었다. 그 전시에 내걸었던 지인의 그림이 바로 얀 베르마르의 작품 <진주 귀고리 소녀>(얀 베르메르 (naver.com) 참조)였다.


다행히 영화는 넷플릭스에 있었다. 영화를 클릭하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가난한 농가의 부엌. 부지런히 야채를 썰고 있는 한 소녀가 보인다. 엄마의 부름에 고개를 드는 소녀. 입매가 어딘가 낯이 익다. 아, 스칼렛 요한슨. 잠시 영상을 멈추고 제작 연도를 살폈다. 2003년. 스칼렛 요한슨의 20년 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라니. 아무 정보 없이 영화를 접할 때면 이런 행운을 낚는다. 예기치 않은 만남은 언제나 짜릿하다.


얀 베르마르는 1660년대 네덜란드 화가로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빛의 효과를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덕분에 후대에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 영향을 미친 화가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작품에 얽힌 이야기나 사생활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남긴 작품도 단 35점. 그중에서도 후대의 호기심을 유독 자극하는 작품이 바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라고 한다. 허름한 옷차림의 소녀가 값비싼 진주 귀고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진주의 하이라이트를 단 두 번의 붓 터치로 표현했기 때문이라나(얀 베르메르 (naver.com) 참조).


그렇다고 영화가 그림에 얽힌 비화를 보여주거나 베일에 싸인 화가의 일정 시기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미국의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1999년에 출간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영화의 이야기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영화는 그림에 얽힌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소설가가 상상으로 버무려 놓은 이야기인 것이다. 실제로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베르메르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고, 그림의 모델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어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는 오히려 유리했다고 한다(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 나무위키 (namu.wiki) 참조).


영화는 가난한 한 소녀가 어떻게 그림의 모델이 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과정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의 삶과 색에 대한 이야기였다. 후원자가 아니고는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화가. 그 때문에 그림을 빼고는 모든 면에서 화가는 무력하다. 여섯 명의 아이와 아내, 장모, 하인들까지 수십 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화가에게 그림은 예술 이전에 생계 수단이다. 후원자의 입맛에 맞춰 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러다 소녀를 만난다.


소녀는 가난 때문에 화가의 집에 하녀로 들어오게 되었다. 화가의 작업실 청소를 맡게 된 소녀는 그곳에서 자신도 몰랐던 심미안을 발견한다. 구도와 색을 판별하는 눈. 그 눈을 알게 된 화가는 소녀에게 색을 섞는 일을 시킨다. 당시 유화는 광물을 통해 색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일일이 가루를 개고 섞어야 했다. 소녀와 함께 물감을 만들며 화가는 작은 기쁨을 맛본다.  


이 영화의 백미는 그런 장면들이다. 조심스레 기름을 섞으며 물감을 만들고, 구름을 바라보며 색을 발견하고, 치워진 의자를 보고 그림을 수정하는 화가의 모습 같은 것. 그런 면에서 영화가 아슬아슬한 멜로의 흐름을 좇기보다는 그런 작은 기쁨을 묘사하는 데 더 치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내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결코 멜로 영화일 수 없는 이유이다.




지인의 작품은 여전히 모작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손을 놓지 않고 계속 그려나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자신만의 작품도 그려낼 것이다. 작은 기쁨을 누리는 지인의 나날에서 언젠가 도래할 그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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