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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Jan 04. 2024

극악무도한 아내

막내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안부 전화였다. 시댁 단체톡으로 이미 새해인사를 주고받은 터라 인사가 새삼스러웠지만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눈치채게 되었다. 형님의 전화가 정작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올해 남편은 환갑을 맞았다. 막내형님이 전화를 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형님들은 남편의 환갑을 챙겨주고 싶어 했다. 친정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 둘째형님도 오신다는 걸 보니 형님들이 얼마나 동생의 환갑을 챙기고 싶어 하는지 그 마음이 읽혔다. 


예전과 달리 요즘 환갑은 잔치할 만한 나이가 아니다. 백세 시대이다 보니 여느 생일과 다름없는 예사로운 나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갑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잔치할 만한 나이다. 시집이 그랬다. 


시집에서 '환갑'은 각별한 나이다. 시아버지가 환갑잔치 후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형님들은 장수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 애통한 마음이 컸다. 그 애통함은 고생만 하다 가셨다는 이유도 한몫했지만 그런 아버지는 세상에 없다는 애틋함에서 비롯했다.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눈물짓는 자식의 모습을 나는 시집에서 처음 보았다. 


허튼짓과 딸을 하대하는 일상이 흔한 시집의 마을에서 아내만을 바라보고 딸들에게도 하대 한 번, 욕설 한 번 내뱉은 적이 없다는 시아버지의 이야기는 시집에서는 자부심 그 자체였다. 내게도 가족을 위해 원양어선을 타고, 어렵게 땅을 일궈 지금의 터전을 마련했다는 시아버지의 이야기는 그 어떤 영웅의 이야기보다 큰 감동을 선사했다. 연애 시절, 남편과의 만남이 즐거웠던 것은 그런 시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였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자 누이 넷을 둔 장손이라는 사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던 것도 그런 자부심에 눈이 부셨기 때문이었다.


막내형님의 전화를 받고서야 남편이 그런 시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때때로 남편에게 분노하고 실망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는 오롯이 본연의 모습만 보아주기를 바랐으면서도 정작 남편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남편에게서 시아버지를 보았다. 시아버지처럼 헌신하는 한 남자를 보았다. '남편'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만을 본 것이다. 그랬던 까닭에 그 시선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마음을 잘랐다. 나그네의 키가 침대에 맞지 않으면 다리를 자르고 머리를 잘랐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당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지금 보니 극악무도한 아내가 따로 없다. 그런 아내의 실체를 안다면 남편은 무어라 할까. 슬퍼할까, 아니면 분노할까. 


올해 남편은 예순하나가 되었다. 결혼한 지는 서른 해가 되었다. 돌아보니 그동안 잔정 없는 곰 같은 아내와 지내느라 마음고생이 많았겠다 싶다. 남편의 마음고생을 이제야 돌아본다. 외로웠을 시간을 이제야 헤아린다. 극악무도한 아내는 이제야 묵묵히 무탈하게 곁을 지켜준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어진다. 이제는 자주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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