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왔다. 마땅히 와야 할 것이 온 것일 뿐이라며 나는 나를 다독여야 했다. 더 나아가 오히려 좋다며 스스로를 설득시켜야 했다. 그래, 오히려 좋아. 시절, 군에서 복무하던 시절 생각이 났다. 불도저 문 틈에 엄지손가락이 끼어 뼈가 으스러졌던 시절. 잘릴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잘리진 않았다. 다행히 잘리진 않아서 나는 제대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아쉽게 됐다며 허세를 부릴 수 있었다. 실밥을 꿰매고 2주가량 붕대를 감고 다니던 시절 하루에 몇 번씩 불규칙하게 찾아오는 통증을 느꼈는데 그때마다 나는 후임들에게 너스레를 떨곤 하였다. 차라리 잘됐다고. 고통이 나를 깨어있도록 한다고,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내 얘기라고, 나의 경우에 그렇다고 선을 긋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어 투명한 맥주잔에 반쯤 담긴 물을 보면서 반 밖에 남지 않았다느니 반이나 남았다느니 하며 서로 긍정적이네 부정적이네 라는 논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지켜보던 누군가가 어른스럽다는 혹자의 평가에 걸맞게 반 정도 남았네 라며 가운데를 짚어 내는 것을 넘어서서 결국엔 나(각자)의 경우라고 선을 긋고 싶은 것이다. <스토너>라는 소설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알코올 중독인 딸에 대한 아빠의 독백인데 - 다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술을 마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술이라도 마실 수 있어서.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생각나는 것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간에서 부정적이라고 알려진 상황일 때에 받아들이는 사람이 긍정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정적인가 긍정적인가. 지나친 긍정이라며 꼴이 보기가 싫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문제보다 당신의 문제가 더 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경우에 - 라는 선을 긋고선 나에 한해서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변호하고 싶은 것이다. 옳은 방향일 것이라고 믿고 있고 믿고 싶으니까. 열어두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든. 가만히 놔두면 떨어질 테니까.
떨어지는 게 뭐가 어떠냐고 한다면,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판단을 무슨 근거로 내리냐고 한다면, 지나친 긍정은 역효과를 낳을 뿐이라고 한다면. 대화가 길어질수록 나는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말을 꺼낸 내가 잘못했다. 눈을 감고 더듬거리며 같이, 함께 찾아보고 싶었던 건데 눈을 감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이미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한 나의 잘못인 것이다.
더 나아가 결국엔 정말 나의 잘못인 것이다. 한번 경험했음에도, 언젠가 다시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대비하지 않았던 나의 잘못이다. 요로결석으로 응급실을 다녀간 시절로부터 불과 몇 달. 통증을 주고 있던 녀석은 빠져나갔고 한놈이 남아있는데 언제 올진 모른다. 아플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여름이고 하니 그저 물을 자주 마시라. 물론 대비한다고 한들 상황은 같을 수도 있다. 그렇게 열어두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자면서 자기 합리화만 하니 반성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반성 또한 긍정적인 에너지에 포함된다고 여기고 싶은 것이다. 그냥 단어가 문제라고 한다면 긍정이고 나발이고 그냥 노력하자고. 노력도 문제라고 한다면 그냥 상태. 고착되어 있지 않은, 유동적인 상태라고 하자. 물처럼 가자고 - <노자>라는 권위를 가져가다 너와 나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이다. 말은 할 만큼 많이 했으니 이제 그만하자고.
그래도 최후의 최후의 최후엔 속으로 말하는 것이다. '오히려 좋아'라고. 나의 주문 같은 것이다. 다시 살펴볼 여력을 주는 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