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을 물려받은 2, 3세대 CEO들은 경영 일선에 뛰어든 후 어떠한 혁신과 변화를 꾀했을까. X세대 출신 CEO부터 밀레니얼 CEO까지, 주목할 만한 승계 기업 사례의 특징과 시사점을 살펴본다.
세계 모든 기업의 약 80% 정도는 ‘가족 기업’이다. 한국의 상장 기업 중 2007~2009년 평균 자산 1000억 원 이상 제조 기업 494개 중 73.7%는 가족 기업인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의 연구 또한 글로벌 대기업 중 가족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15% 선에서 2025년 40% 수준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부의 세습’, ‘사회적 불평등’, ‘후진적 경영’ 등 부정적 시각에도 가족 기업의 경영 성과를 분석한 많은 연구 결과는 매출, 고용, 연구 개발 등 여러 면에서 일반 기업보다 가족 기업의 성과가 더 높다고 말한다. 성공한 가족 기업의 사례를 분석한 책 <세계 장수 기업, 세기를 뛰어넘은 성공>의 저자 윌리엄 오하라는 그 이유에 대해 “가족 기업은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영하고 변화에 순발력 있게 대응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독일의 세계적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주창한 히든 챔피언* 기업의 약 60%는 가업을 승계한 경우다.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야별 세계 시장점유율 1~3위를 차지하는 매출액 40억 달러 이하의 강소 기업을 가리키는 말로,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정의한 개념이다.
가족 기업이 가업을 승계하는 방식에는 여러 선택지가 있다. ‘자녀 승계’, ‘제3자(전문 경영인) 승계’, ‘기업 매각’, ‘사업 제휴’ 등은 법인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CEO 자리를 승계하는 방법으로, 여기에는 장단점이 존재한다. 창업주 대부분은 자녀에게 가업을 넘겨주고 싶어 하지만, 여러 가지 장애 요인이 존재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성공적으로 자녀 승계를 할 확률은 2세대에서 30%, 3세대와 4세대까지 가면 각각 14%, 4%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승계율이 낮아지는 것은 CEO가 기업의 비전, 전략, 구조, 시스템, 문화 등 많은 요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경영 베스트셀러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의 저자 짐 콜린스가 업계 최고 위치까지 올라갔다가 몰락한 세계적 기업 10여 곳을 조사했을 때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CEO 승계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나라의 기업 승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지난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높아져왔다. 일차적인 이유는1970~1980년대 고성장기에 빠르게 늘어난 기업들에서 창업주의 고령화로 승계 문제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한국기업데이터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창업자가 CEO인 국내 기업 5만1256개 중 33.2%인 1만7021개에서 CEO 연령이 60대 이상이었고, 45.1%는 50대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경영권 승계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5~15년이 소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렇게 긴 시간 체계적으로 대비해 승계를 마무리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우선, 창업주가 건강하고 활발하게 경영하는 동안 주변 사람들이 승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 부의 세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의식해 적극적으로 준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빠르게 바뀌는 경영 환경 속에서 사업을 키우고 지키는 데 몰두하다 보면 승계에 필요한 준비를 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는 것 또한 문제다. 그래서 ‘언젠가 물려준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언제, 누구에게, 어떤 절차를 거쳐 승계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공동으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견 기업의 84.4%가 구체적인 가업 승계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경영권 승계는 승계자 결정, 지배 구조, 경영 전략, 후계자 육성, 세무 관계, 대외 관계 등 복잡다단한 이슈가 얽혀 있는 문제로 어느 기업에나 적용 가능한 솔루션은 있을 수 없으며, 사업주 철학, 사업 특성, 조직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준비해야 한다. 글로벌 컨설팅 PWC가 2018년 세계 주요 기업 2500개 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업의 83%는 해당 기업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은 내부 후보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뛰어난 외부 영입 경영자라도 조직 내·외부 상황을 단기간에 파악하는 것이 어렵고, 사업 분야나 전략 등을 급격하게 바꾸는 것은 기업의 구조적 관성과 충돌해 위험을 높인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또 오너가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는 것은 경영 능력이 검증된 경우에만 효과적이라는 맥킨지의 연구 결과는 자녀 승계를 하기 전 충분한 경영 수업을 거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준다.
최근 10년 동안 가업을 승계한 2, 3세대 CEO들은 대체로 1980년대생이 많았다. 대표이사가 밀레니얼 세대(1980~1994년 출생)인 기업 중 매출 상위 100대 기업을 분석했을 때 단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1980년대생이었고, 그 가운데 1980년대 초반(1980~1983년생)에 태어난 이들이 59명(59%)으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밀레니얼 CEO의 대부분은 30대로 패기와 추진력에 기반해 승계 후 괄목할 만한 매출 성과를 냈다는 특징이 있는 한편, 다소 부족한 조직 관리 측면에서는 전문 경영인의 도움을 받는 공동 경영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밀레니얼 세대가 대표직을 맡은 매출 상위 100대 기업 중 44%는 위 세대의 경영진과 함께 기업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10년간 성공적인 국내 가업 승계를 이룬 다음의 사례를 통해 특징과 시사점을 살펴본다.
성공적인 경영권 승계에는 창업주 가족 내 화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부 기업에서 ‘형제의 난’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는 것은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진주햄의 박정진·박경진 형제 사례는 인상적이다. 1963년 창업주 박남규가 회사를 설립했고, 이후 2대 오너 박재복이 IMF 위기 속에서 회사를 지켜냈다. 2000년대 들어서는 CJ, 롯데 같은 대기업이 육가공 사업에 진출하자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06년 당시 26세의 둘째 아들 박경진(1980년생)이 먼저 경영에 참여했고, 2010년 부친이 타계한 후에는 당시 씨티그룹 상무이던 장남 박정진(1975년생)이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가업에 뛰어들었다. 2대에 걸쳐 쌓아 올린 육가공 사업 역량을 바탕으로 매년 70~80개의 신상품을 출시하고, 고객 세분화와 채널 확장 등 마케팅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 공략과 수제 맥주 등 신사업 진출 등을 통해 종합 식품 회사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창업주 세대에 이미 한 업종에서 상당 규모의 사업을 일군 경우, 2세 승계 후 경영권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사업 분야로 확장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1990년 설립해 대한민국 뷰티 산업에서 ODM(제조자 자체 개발 주문 생산) 신화를 쓴 한국콜마는 지주사 전환을 통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한 사례다. 윤상현(1974년생) 부회장은 글로벌 컨설팅 기업 베인앤컴퍼니에서 이사로 근무하다가 2009년 한국콜마 상무로 입사했고, 2016년에 대표이사 사장, 2019년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사실상 경영권 승계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회사가 2019년 1조5407억 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성장한 것은 승계 과정에서 지주사 전환을 통해 여러 사업을 지배할 수 있는 거버넌스 체계를 갖추고 사업을 다각화했기 때문이다. 화장품 연구와 제조를 통해 구축한 탄탄한 운영 능력을 바탕으로 헬스 케어 분야 자산을 적극 인수해 사업 파이를 키운 것이다. 2018년 대기업 계열 씨제이헬스케어를 성공리에 인수, 헬스 케어 회사로 변모시킨 것이 주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선대 경영자의 유고나 경영 위기 등으로 급하게 승계에 나서는 경우 기존 조직의 운영 지속성을 해치고 경영을 위험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위기를 기회로 삼아 극복한 사례가 있다. 삼진인터내셔널의 박용준(1983년생)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한국전쟁 중 부산에 몰려든 피란민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어묵 공장으로 시작한 삼진어묵은 2011년 공장 신축 과정에서 발생한 채무로 경영 위기에 빠졌다. 당시 미국에서 학업을 막 마친 28세의 박용준은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해 가업에 뛰어들었다. 거래선 납품에 의존하던 기존 사업 방식을 탈피해 소비자 직접 판매 방식을 개척하고 2013년 어묵 베이커리 사업에 진출함으로써 ‘반찬에서 베이커리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하지만 2016년 매출액 700억 원을 넘기 시작하자 조직 관리의 한계를 느끼고 식품업계 30년 경력의 동원F&B 황종현 부사장을 삼진어묵 대표이사로 영입했다. 동시에 박용준은 마케팅과 해외 사업 개척에 집중했다. 이런 혁신을 통해 삼진어묵은 프리미엄 어묵 시장의 선구자가 되었고, 경영을 승계한 2013년 82억 원이던 매출은 2018년 960억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창업주의 경영권은 당연히 그 혈육에게 물려준다는 고정 관념을 깨고, 기업을 더욱 성장시킬 수 있는 우호적 투자자나 동종사에 매각 또는 합병하는 방식으로 승계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도 있다. 밀폐 용기로 유명한 주방용품업체 락앤락이 그렇다. 1978년 국진화공을 설립해 39년간 회사를 이끌어온 최대 주주 김준일 회장은 본인과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2017년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 어피니티 에쿼티 파트너스에 매각했다.여기서주목할만한점은김회장의세아들중첫째와둘째가락앤락에근무를하고있음에도 승계가 아닌, 뜻밖의 결정을 했다는 점이다. 김 회장은 매각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자식에게 기업을 물려주면 큰 짐이 될 것”이라며 “자식들이 행복할 수 있을지 생각한 끝에 매각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 후임 CEO는 삼성SDS에서 부사장을 역임한 전문 경영인 김성훈 대표가 선임되었다.
김성남
<미래조직4.0>의 저자 겸 HRD 전문 칼럼니스트, 20년 경력의 기업 및 조직 문화 컨설턴트다. <하버드비즈 니스리뷰>, <동아비즈니스리뷰> 기고를 비롯해 삼성과 포스코, SK 등에서 인사조직, 인재육성, 기업문화에 관해 강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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