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아이, 글 쓰는 나

세종대왕님께

by 제주미진

한때

저의 별칭은 '한글이'였습니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하던 가게에 자주오던 손님이 저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알려주기 싫었습니다. 그러다 가게 주인이 국문학과라고 제 전공 이야기를 한 모양입니다.


며칠 후, 부대에 복귀한 손님이 가게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한글이'에게라고 적어서요. 유치함에 웃음이 났지만 이름 대신 전공 관련 별칭으로 불리던 그 시절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25년의 시간이 흘렀고 편지는 없지만 한글날이 되면 그때의 즐거운 기억으로 떠오릅니다.


언제

처음 한글을 썼는지 읽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저는 매우 느린 아이였습니다. 공부도 느렸고, 행동도 느렸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 "똘똘하게 생겨서 성적이 왜 안나올까?"였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수업시간에 졸지 않고 잘 들었는데요.


어른이 되어서 『창가의 토토』를 여러 번 읽게 되면서 토토가 부러웠습니다. 토토가 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수업시간에 멍때려본 적이 없는 저는 창 밖을 보며 멍때리는 토토가 부러웠습니다. 세상의 틀을 벗어난 자유로운 아이 토토가 부러웠습니다.


『빨강머리 앤』을 읽을 때도 그랬습니다.

길버트와 성적을 두고 최선을 다해 공부했던 빨강머리 앤이 사랑스러웠습니다. 많은 것을 궁금해 하고 배우려 노력하고 시도해보는 앤의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어쩜 그리도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열심히 수업들었지만 성적이 좋지 않은 저는 대학을 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추천으로 대학과 학과를 골라 국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첫 문학시간, 이미 친구들은 '가시리', '관동별곡, '훈민정음'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너희 이거 배웠어?"

"?????"

묻는 저를 향해 친구들의 표정이 으아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정엄마 암투병을 간호했던지라 수업시간에 들었던 내용들이 제것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고전 문학 시간마다 배우는 훈민정음 언해본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춘향전 언해본을 매주 읽을 때면 이야기에 폭 빠져 재밌기만 했습니다. 대학수업이 이리도 재밌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받아쓰기가 늘 어렵던 제가 국문학과에 입학하고, 학업성취도가 낮은 제가 수업을 즐기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과정이 '한글'과 관련있다는 사실이, 느리고 서툴렀던 시간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저를 닮은 아이가 있습니다. 둘째 아이는 받아쓰기를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그림책은 하루종일도 보면서 글씨쓰기를 어찌나 싫어하고 소리내어 읽는 것은 더 힘들어했던 둘째.


책읽기와 글쓰기에 흥미를 가져보라고 보낸 수업에서 둘째는 한글그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때 알았습니다. 나를 닮았고, 공부보다는 자신에게 흥미가 있는 일을 하면 살아야하는 아이임을 인정하게 되었지요.


지금 그 아이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면서 고등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고 있고요.


대학시절, 배움의 즐거움 속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었던 저.

그림으로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둘째.

우리는 각자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글 덕분에 저의 이야기를 쓰고, 아이의 세계를 읽고 있습니다.

세종대왕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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