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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앓이 Oct 17. 2021

혼맥의 품격 12

그 해 겨울 캘리포니아

(코로나가 없던 그 시절의)


얼마 전 지인의 겨울 휴가 계획을 듣게 되었다. 부부 서퍼인 그들은 추위를 피해 캘리포니아행 겨울방학을 계획했단다. 사실 장시간의 비행과 시차의 불편함 때문에 해외여행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좀처럼 질투심 없는 나도 그들의 겨울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비록 오래전 한 번뿐이었지만, 강렬하게 아름다웠던 내 추억 속 캘리포니아를 늘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년 전 겨울 나의 시간은 캘리포니아에서 흐르고 있었다. 꿈만 같았던 나의 미국행은 군 생활을 마친 나에게 주는 셀프 보상이자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와의 관계를 반대하던 엄마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순탄치 못했던 군생활을 일찍 마무리한 나는 결혼이라는 것으로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없이 선하고 날 사랑해주던 그는 일찍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런 그를 못마땅해하시던 엄마의 이별 강요는 급기야 내가 곤히 잠든 새벽 시간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언제 헤어질 거냐고 소리를 지르시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분명 현명하게 대처할 방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런 엄마 앞에서 늘 울기만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바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단기 어학연수라는 겁쟁이의 길을 택했다.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참 잘한 결정이었다.


@산타바바라(2014)


내가 머물렀던 산타바바라는 미서부의 대표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치안도 좋고 비교적 한적한 분위기의 휴양도시라는 유학원 담당자의 설명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서는 무조건적인 행복과 평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첫 일주일은 시차와 적응하느라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겨우 일어나 어학원에 다녀왔고 오후에는 두통에 시달리며 억지로 잠을 참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홈스테이 가정에 먼저 와있던 프랑스 아가씨가 살뜰히 챙겨주었던 탓에 금방 현지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당시 챙겨갔던 화장품과 선글라스가 프랑스 제품이었던 것이 크게 한몫했던 것 같다. 


@산타바바라(2014)


그녀를 통해 어학원 친구들과도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각국에서 온 20대 소녀들과 함께하는 어학원 생활은 천국과도 같았다. 강산이 한번 바뀔 나이 차이는 그녀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듯 우리는 늘 웃고 떠들며 낮과 밤을 함께 보냈다. 


혼자인 시간도 외로울 틈 없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정원이 보이는 멋진 스튜디오에서 요가를 배우고 블랙프라이데이를 즈음하여 파격 세일을 하는 쇼핑몰은 매일매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었으니 말이다.  

@산타바바라의 요가스튜디오(2014)

한 달 간의 홈스테이를 마치고 머물게 된 아파트에서의 생활 또한 완벽 그 자체 었다. 지역 대학에서 요가를 가르친다는 집주인은 일주일의 대부분을 남자 친구의 집에서 보냈다. 덕분에 테라스에서 멀리 바다가 보이는 그녀의 멋진 아파트는 언제나 내 차지였다. 오가닉 라이프스타일로 꾸며진 집에서는 늘 기분 좋은 자연의 향기가 났다. 어쩌다 일찍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햇살이 비출 때면 탁자 위의 놓인 그녀의 책을 읽는 척하며(진지한 영어 문장들이라 정독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행복한 나만의 오후를 만끽했다.


@산타바바라(2014)

에어비앤비 호스트이기도 했던 집주인은 게스트들을 위해 산타바바라 소개 책자를 늘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했다. 그 책자는 일종의 광고들도 구성된 브로슈어 같은 것이었는데 나에게 가장 필요한 책이기도 했다.(사실 이미지가 많이 실려있었기 때문에 보기에 나쁘지 않았던 이유가 더 큰 듯싶다.)

유명 레스토랑, 와인 테스팅 룸, 다음 주에 다운타운 거리에서 열릴 파머스 마켓 광고를 지나 맥주 경연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는 지역 맥주의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이구아나 한 마리가 인상적인 지역맥주 광고 이미지를 보니 일전에 들렀던 마켓에서 기이한 그림에 시선을 빼앗겨 잠깐 구경한 맥주가 떠올랐다. 이렇게나 유명한지 진작 알았더라면 한 병 사 왔을 테지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곧 그 맥주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Lizard mouth(2014)

LIZARD'S MOUTH IMPERIAL IPA

미국/Figueroa Mountain Brewing/9%
도마뱀의 입 이라니 이름 한번 흉악하다. 그래도 화려한 수상경력이 빛나는 맥주인 데다가 미국에 온 뒤 마셨던 맥주들은 모두 맛있었던 좋은 기억이 있어 당연히 맛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호기롭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런데 아 이런… 쓰다. 그냥 쓴 것이 아니라 약간 텁텁함 마저 느껴지는 강렬함에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IPA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도수와 맛을 자랑하는 임페리얼 IPA에 겁 없이 도전한 맥알못이라니...지못미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적지 않은 돈을 지불했지만 그날의 도마뱀 입 맥주는 거침없는 하수구행이었다. 그 후 잊고 있었던 리자드 마우스를 귀국을 앞둔 어느 날 근처 레스토랑에서 다시 마실 수 있었다. 다행히 두 번째 만남은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상당히 맛있는 한잔 맥주 한 잔으로 기억되었다.


@Lizard mouth be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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