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가 요즘 뭘 먹지도 못하고 몸이 막 빠지는 것 닮다, 영양제(수액)라도 한번 맞아야 됨직 허다 "
94세 노모는 힘이 떨어질 때쯤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영양제(링거액)를 맞곤 한다. 그런데 움직임이 불편해지면서부터는 혼자 병원을 갈 입장이 못되니 때가 되면 전화가 온다.
" 이번주에 아무 때나 시간 내서 한번 왕 가라 "
" 예, 집에 가서 일정 보고 연락허쿠다 "
누나와 통화가 끝나고 나니 어머니 상태가 궁금했다. 직접 어머니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 몸이 안좋텐허멍 마씸, 어떤햄쑤과(제주어: 몸이 안좋다면서요, 어떤 상태이신지요) "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결론은 영양제를 맞고 싶으니 이번주 토요일이라도 와서 병원 픽업을 해달라는 말이었다. 그러겠노라고 했다.
지녁시간 아내는 외출을 하고 집에서 혼자 TV를 보고 있는데, 마음이 영 편치 않다.
내일 일정표를 보니 저녁 6시까지는 시간이 비어있었다.
" 내일 서귀포를 갔다 왔으면 하는데, 당신 일정이 어떻게 되지? "
어머니는 움직임이 불편해서 옆에 누가 같이 있어야 하기에 아내에게 동반을 권유하는 질문을 했다.
" 난 괜찮아요, 그럼 내일 다녀오지 뭐 " 아내가 흔쾌히 수락을 했다.
나이가 들면 어르신들은 늘 다니던 동네병원을 선호한다. 주기적으로 가지 않으면 안달이 날 정도다. 장모님이 그러셨고, 어머님이 그러신다. 장모님이 살아 계실 적 우리는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 무슨 이유일까? " 우리는 장모님이 병원을 다닐 때 몇 번을 따라가 본 적이 있다.
일단 병원을 들어서는 순간 간호사 분들이 전부 알아보신다. 접수도 얼굴만 보고는 척척이다.
" 저기 않아계십써 "
" 응, 오늘은 나 물리치료도 받젠 " " 나 오늘은 주사도 맞을 거 "
이런 식으로 주문을 한다. 완전 VIP다.
진찰실에 들어서면 의사도 마치 동네 삼촌이나 어머니를 대하는 듯 친절하게 대한다.
" 어머니 오랜만이우다. 한동안 안 보연게.. 난 어디 가부러시카부덴 했쑤다.. "
' 저번에 드린 약은 다 먹었쑤과? "
" 요샌 병원에 안왕게 마는, 괜찮으꽈 , 오늘은 어떵허영 마씸 "
(제주어: 요새는 병원에 안오던데, 괜찮으신지요, 오늘은 어떻케 오셨는지요?)
의사는 손으로 진찰을 하면서 부지런히 립서비스를 한다. 차트에 모든 게 기록이 돼있겠지마는 마치 모든 걸 외는 것 같이 의사는 술술 얘기를 한다. 내가 배 아파서 난 자식도 지금의 부모님의 상태를 모르건만 남인 의사라는 양반이 나에 대해서 별거를 다 안다. 건강을 묻고, 요즘 근황을 묻고, 덕담을 한다. 그 순간 부모님은 완전히 무장해제가 된다.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리면서 여기저기 아프다고 얘기하는 듯, 의사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는다.
요즘 자식들은 왜 모두 다 바쁜지 모르겠다. 내가 10달 배아파서 난 자식도 집에서 얼굴 한번 보기, 대화한번 해보기가 어렵다. 사람이 그립고 대화가 그립다. 그런데 병원에 오니 얼굴도 보이고 말도 할 수 있는데 더 중요한건 내가 하는말에 리액션도 해주고 들어주기도 한다. 마음치료에 대화까지 척척이다. 오랜만에 사람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할 수 있는 데다 아픈 곳까지 치료를 해주는 곳, 이곳이 낙원이다. 그래서 혼자 계시는 어르신들이 동네 단골의원만을 고집하는 모양이다.
오늘 찾은 병원도 어머니의 오랜 단골이다. 족히 10년은 더 다녔다고 한다.
일반의사가 하는 의원이라 전문시설이 없다. 진료과목도 한정이 되어 있다. 때문에 오래 다니다 보면 자신의 범위를 벗어난 병이 진단되는 경우가 있다.
" 친찰해보니까 요건 다른 큰 병원에 가보는 게 조쿠다. 자식들한테 연락허영 큰 병원에 가봅써 "
이런 식이다. 의사들이 혼자 어떻게 치료해 보려다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의사는 자신의 범위를 벗어나거나 진단 장비가 없으면 스스로 다른 병원에 가기를 권유한다. 어머니도 그랬고, 누나의 경우도 그랬다. 그러니 어머니는 오랜 단골인 이 병원에 빛을 진 느낌인 모양이다. 가끔씩은 다정한 얘기를 해주던 의사도 생각나고, 어머니 이름을 불러주던 간호사들도 얼굴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영양제만은 항상 이 병원에서 맞기를 고집한다.
병원은 시내 한복판 구도심에 있다. 오래된 건물이라 시설도 썩 좋치는 못하다. 병원에 들어서면 수작업 차트들이 책장에 쌓여있다. 방금 점심시간이 지나선지 손님은 없다.
어머니가 진찰실에 들어서자마자 의사가 어머니를 알아보고는 반긴다. 같이 간 자식들이 미안할 정도다.
" 잘도 오랜만에 왔쑤다. 어떻허연 마씸 ?? "
" 오랜만에 영양제나 맞으카 허연 왔쑤다. 맞아질꺼지 예 "
" 경허주 마씸. 영양제 놔드릴 거고.. 영보난 여름 이때쯤에는 항상 장약을 받아다 먹은 것 닮은디 마씸.."
척척이다. 그래서 단골 병원, 주치의가 필요한 모양이다.
사실 요새 어머니는 "변비다, 설사다" 장이 안 좋아서 컨디션이 전체적으로 나빠진 것이다.
" 예, 경 안 해도 요새 장이 안 좋은 거 닮아신디, 약도 처방해 줍써 "
저녁시간 전화를 드렸다.
며느리가 사다 놓은 재료로 맛있는 것을 해서 먹었다고 아내에게 자랑을 한다. 요즘 탈이 많아서 별로 음식을 안 먹던 어머니다.
"오늘 병원에서 장약도 가져오고 허난 마음놘 저녁핸 먹었쪄. 걱정 말라 "
며칠째 기운이 없던 어머니는 단골 병원에서 마음도 치유받고, 영양제도 맞고, 처방도 받아서 기운이 솟는 모양이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