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표지석이 달라졌네” 하고 중얼거리면서 주차를 하고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파랗던 수목들이 겨울을 타서 그런지 다들 누렇게 변하고, 오름은 벌거숭이다.
고풍스럽고 절스러운 표지석.. 마음이 동한다
漢拏山 觀音寺라고 일필휘지 되어있는 일주문 앞에 서서 멀리 보이는 사천왕문을 쳐다봤다.
사천왕문에 가려서인지 대웅전이나 사찰 건물들은 보이지 않는다.
관음사는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가는 길이 제법 길다.
일주문 너머로 보이는 산사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셔터를 몇 번 눌렀다.
일주문에서 사천왕문까지의 길고 곧게 뻗은 돌담길과 부처님 석상들이 한 앵글에 들어온다.
그 길은 인간이 속세에서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좁은 지를 암시해 주는 듯하다.
오늘따라 나에게 묘한 기운을 준다.
정문은 공사 중이어서 좌측으로 난길을 따라 돌담길을 걷기 시작했다.
돌담 위에는 각기 다른 모습을 한 부처상들이
부처의 세계로 들어오는 중생들을 어서 오라고 환영해 주는 듯 자애로운 표정이다.
속세에서 부처세계를 이어주는 듯한 긴 터널
여기는 대한불교 조계종 23 교구 본사인 관음사다. 아무래도 산속이어서 그런지 매우 춥다. 잔뜩 움츠리고 얼굴을 찡그린 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날씨 때문인가 방문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대웅전 주위는 많이 변해있었다.
"일단 절에 왔으니, 대웅전 가서 삼배를 해야지.."
아내에게 말을 하면서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예상치 않은 말소리가 우리를 멈춰 세웠다.
“ 어서 오십시오, 춥지예.. 와서 차나 한잔하고 가십써”
“ 웬일! , 관음사에서는 방문객을 이렇게까지 맞이해 주나? ” 하는 생각과 함께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이게 누군가?" 나와 같이 마을활동가 교육을 받았던 후배다. 얼마 전 행사에서 오랜만에 만났을 때 관음사에서 템플스테이 진행을 한다고 듣기는 했지만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 아니! 여기서 이렇게 근무하는 건가요? ”
“예, 저만치서 올라오는 분이 선생님인 것 같아서 가만히 보고 있었습니다. 추운데 들어와서 차 한잔 하시죠”
이런 반가울 때가 있나. 그렇지 않아도 춥고, 어색한 마음에 잔뜩 움츠려 있던 우리 부부에게 는 반가운 제안이었다.
“ 예, 고맙습니다. 먼저 대웅전에 들려서 삼배하고 올게요”
우리 부부는 삼배를 하려고 대웅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합장하고 삼배를 하고, 잠시 법당 안에서 몸을 녹였다. 그런데 내 기분 탓인가, 법당 안의 독특한 향 내음을 느낄 수가 없다.
나는 마음이 복잡하거나 시간이 있을 때 가끔씩은 절을 찾는 편이다. 특별한 뜻이 있어서기 보다는 대웅전에서 삼배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향 내음이 내게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다.
지인은 이미 따뜻하게 차를 끓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투명한 주전자 너머로 비치는 차의 짙은 색깔이 유난히도 고와 보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이차라고 했다.
우리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테이블에 앉았다. 찻잔에 손을 갖다 대니 따스함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가슴을 타고 내려가는 기운이 느껴진다. 지인은 우리가 춥다는 것을 느꼈는지 옆에 히터까지 틀어주면서 몸을 녹이라고 했다. 아내는 지인을 처음 만나지만 추운 겨울 따뜻하게 맞아주고, 정성이 담긴 차를 내주어서 그런지 우리는 금방 절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로 금방 친숙해졌다. 주전자에 있는 보이차를 몇 번 우려내서 마실 정도의 시간이었으니 꽤 긴 시간 우리는 산사에서 정담을 나눈 듯싶다.
“ 내가, 전에는 법당에서 향 내음을 맡으면 차분해지기도 하고, 굉장히 편해지기도 하고 정제되는 느낌을 받거든.... 그런 것 때문에 종종 법당을 찾기도 했는데.. 몇 해 전부터는 법당 안에서 향냄새를 못 느껴.. 이제는 향이 다른 종류를 사용하는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라고 지인에게 종전 법당에서 느꼈던 내 답답한 심정을 말로 툭 던졌다.
“ 그건, 마음이 다른 거로 꽉 차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우꽈.. 법당의 향내음이나, 불경소리가 들어갈 틈이 없으니까 그런 거 마씸.. 마음을 비웁써..” 지인은 웃으면서 주저 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어, 그래.."
순간 뿅망치로 한 방을 맞은 느낌이다. 몇 년 동안 꾹 참았던 아주 고민이던 심정을 얘기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아주 쉽게 답이 나와서 말이다. "그런 건가?"
“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이 말은 가끔 내가 강의를 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었는데.
아!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듯, 그게 나한테 필요한 평범한 지혜라는 것은 미처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순간 아리송해지면서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를 만들고 활동을 하면서 사찰을 찾기 시작했다. 사춘기와 고3 수험생 시절, 고민 많은 청춘에게 법당 특유의 향 내음은 너무 좋았고, 내 마음의 안정제였던 것 같다. 이후 마음이 불안하거나,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쌓일 때, 뭔가는 결정을 할 때 나는 종종 조용한 산사를 찾아서 걷거나, 법당 안 분위기에 취함으로써 위안을 얻곤 했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법당에 들어가서도 향내음을 맡을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처음에는 내 후각에 문제가 생긴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제사를 지낼 때 피우는 향 냄새는 정확히 맡을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에야 그 이유를 찾은 것 같다. 내 마음에 빈 곳이 없어서다. 털어내지 못한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그동안 절간의 향 내음이 들어갈 틈이 없어서, 내 마음을 적셔주지 못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