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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석 Jun 20. 2023

게으른 농부가 바빠지는 날

게으른 농부도 어쩔 수 없이 바빠지는 날들이 온다.


요즘은 하루 걸러 유심재를 찾는 것 같다.

애호박을 따기 위해서다. 애호박이라서 그런지 하루만 지나도 쑥 커버린다. 어느 정도 크기가 되고 본격적인 자람을 할 때쯤이 문제다. 따기는 좀 작은 것 같아서 두었다가 하루 걸러 이틀째 가보면 그건 이미 애호박이 아니다. 어른 호박이 돼버린다. 속을 잘라보면 씨가 자리를 잡고 있다.

조금지나 수확한 애호박과 백다다기 오이



" 저 크기면 안에 씨가 있어. 애호박이 아니야. 못 먹지 "  작년부터 애호박을 재배하면서 아내와 매일 티격태격하던 부분이다. 그러나 유심재에 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일들이 있는데 매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애호박의 수확적기를 잡는 게 문제다. 실제로 난감한 부분이다. 가급적이면 좀 이르다 싶어도 수확을 하는 편이다.




애호박 모종 6개를 오일장날 구입하다가 우영팟에 심었다.

터널 안에서 재배하다 보니 순 지르기를 하지 못했다. 조금 이른 정식을 했는지 처음에는 자람도 좀 늦었다.


" 이거 제대로 자라기나 하겠어 " 

" 며칠 기다려보고 제대로 안 크면 다시 사다가 심어야지.." 아내와 주고받던 말이다.


반포기 상태였다. 일이 겹쳐서 유심재 가는 일을 며칠째 걸렀다. 며칠 만에 마주한 호박은 자라기로 마음을 먹은 듯 이미 터널 안이 좁다고 아우성이었다. 터널을 걷어내니 세상이 좁다고 이리저리 마음대로 덩굴로 영역표시를 한다. 꽃이 피고 나비가 오가더니 애호박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성하고 큰 호박잎에 가려서 애호박을 찾을 수도 없었고 햇빛을 맞으면서 크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지주대를 세우고 줄로 엮는 작업을 했다. 덩굴을 유인하고 묶고 고정시키는 작업 반나절이나 걸렸다. 덕분에 애호박이 자라는 모습을 집안에서도 훤히 볼 수 있어서 미관상 아주 좋은 그림이다.



다 팔 것도 아니라 순 지르기도 안 하고 피는 꽃도 그대로 두어서 그런지 수확량은 쏠쏠하다. 매번 10개 내외는 딴다. 그런데 소비가 문제다. 냉장고에 마구 저장해 둘 수도 없다. 알고 있는 소비방법이 다양하지가 않다.

어머니와 누나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내의 지인한테도 나눔을 했다. 첫 수확품은 서울에 있는 자녀들한테 기념으로 보냈다.


애호박을 한꺼번에 가장 많이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이 부침개라고 한다. 부침개 하면 막걸리가 아니겠는가? 집에서 막걸리 한 병에 애호박 부침개 한사라를 했다. 애꿎은 막걸리만 몇 병 비웠다. 그래도 한 번에 10여 개를 수확하는 애호박은 냉장고에 남는다.


요즘 아내는 애호박을 따는 족족 모두 썰어서 햇빛에 말리고 있다. 말리고 보관을 해 두었다가 간단하게 조리를 해서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모양이다.


" 글쎄 나중에 제대로 먹을 수 있겠어? "

" 모르지, 나도 안먹어봤으니, 그런데 가끔 식당에 가면 나오지.. 괜찮은 것 같던데.."



애호박 바로옆에는 백다다기 오이가 가지마다 주렁주렁이다. 누가 다닥다닥 붙어서 자란다고 해서 다다기오이라고 했다고 한다. 원래 백다다기 오이를 구입한 게 아니고 가시오이를 구입했는데 모종상에서 잘못 골라준 모양이다. 자라는 걸 보니 작년 하고는 모양이 다르고, 하얀색을 띠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터다.

애호박과 마찬가지로 멀칭을 하고 터널을 해서 모종을 심었다. 어느 정도 자라서는 터널을 해체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줄로 유인을 했다.

 

제주에는 여름철 불청객 태풍이 있다. 매년 태풍에 지주대를 세운 오이는 쑥대밭이 된다. 태풍이 지난간 날, 줄기가 날아다니고 뿌리가 뽑히고, 잎이 바람에 털려서 더 이상 오이 수확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올해는 지주대를 올리지 않았다. 얼마가지 않아서 식물은 나름대로의 사는 방법이 있고, 농가에서 재배하는 방법에는 다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땅바닥에서 자라는 오이는 모양이 이쁘게 만들어지지 않을 뿐더러, 흙의 균들과 섞여서인지 제대로 자라지를 않았다. 할 수 없이 늦게나마 지주대를 세우고 덩굴을 유인했다.


"태풍이 오기 전까지만 열리는 거 따먹지 뭐.."  아내와 체념한 듯 쑥덕였다.

지주대를 타고 올라가서 오이들이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모양도 이쁘게 길쭉하고 날씬하다. 마트에 진열된 오이 같아 보인다. 제대로 자라는 모양이다.

요새는 유심재를 가는 일이 즐겁다. 가는 날마다 바구니 가득 채울 수 있는 수확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같이 심었던 고추들도 이제는 한입거리 이상이 되었다. 지나다 슬쩍 따서 주머니에 넣고 온다. 이따 저녁때 된장찍어서 먹어볼 생각이다.  

방울방울 맺힌 방울토마토도 이젠 색깔만 변하면 먹을 수 있다.

다음 주 서귀포에 갈 때는 가지도 몇 개 따서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봄철 농부가 바빴던 땀의 댓가를  자연은 이렇게  때가 되면 군말없이 풍성하게 돌려주고 만다.

자연이 우리에게 현물로 보상을 해주는 날, 게으른 농부도 바빠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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