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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석 Dec 16. 2023

겨울비는 내리고.. 평화로에서

겨울비를 맞으면서 한라산 아래 첫 마을 가는 길

겨울비가 내리는 평화로는 자욱한 안개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다.


좀 이른 시간이다.

그러나 하고 있는 강의가 오늘까지 잡혀 있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한다. 커피를 내리고 보온병에 담았다. 그리곤 예전 그랬듯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발코니에서 창밖을 볼 때는 도로의 원색이 보이길래 비가 그친 걸로 알았다. 그러나 바깥세상은 금세 비가 건지 대지가 촉촉하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까지 가는 길 몇 방울의 비가 내 머리에 차가움을 더해준다.


" 응, 오늘도 비가 오네, 저녁에 회의가 있어서 시내 나가야 하는데 불편하겠구먼..." 혼자 중얼거려 본다


오늘 회의는 연말결산인지라 워크숍으로 한다고 한다. 본일정이 끝나고 저녁자리가 있다고 하니  음주가 동반되는 자리라는 얘기다. 이럴 때면 나는 으레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가끔씩 느껴보는 손과 발이 자유스러운 시간이다. 이런저런 잡념에 잠길 수도 있고 창밖세상을 보면서 멍을 때릴 수도 있다. 그러나 비가 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진다. 비를 맞으면서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있기에 조금은 불편을 느끼게 된다. 이따 오후 되면 달라질 수도 있으니 기다려보자..



차를 타고 보온병 속의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다. 한 모금의 따뜻한 커피는 짙은 향기를 내 몸속 깊이 전해준다.

때마침 어제 다만 해바라기의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차 안 분위기를 익숙하게 만들어 준다. 


내가 소싯적(?) 한참 기타를 치고 다닐 때 즐겨 부르던 노래다. 

아내하고 연애를 할 때 내가 많이 불러주기도 한 것 같다. 그때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다. 

" 사람이 뭔가에 미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그 음악이 흘러나오면 우리 부부는 서로 마주 보고 웃는다. 

이게 노래에 얽힌 추억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는 우리 부부를 특정 지어주는 애정하는 노래가 되었다.



오늘 목적지는 안덕면 광평리다.

자칭 "한라산 아래 첫 마을"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 해안과 한라산하고의 중간 어느 정도 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시대 몽골의 제주 간섭기에는 국마장이 조성될 정도로 광활한 평원지대를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10소장이 설치되고 주변에 화전마을들이 생기면서 70여 호 가진 큰 마을이었으나 제주 4·3으로 모두 해안으로 소개가 되어 없어졌던 마을, 1955년 이후 주민들이 돌아오면서 마을을 재건 중이나 옛 명성을 되찾지는 못하고 있다고 한다.


광평리를 가기 위해서는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평화로를 타야 한다. 

화로는 아마 제주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은 도로일 것이다. 이도로는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가는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이다. 한라산을 가로질러서 횡단하는 게 아니고 휑하니 펼쳐진 들판사이를 지나는 길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곡선도로도 없다. 휑하니 펼쳐진 넓은 초원은 달리는 제주의 고속도로가 되는 셈이다. 


도로 주변은 넓은 들판과 오름, 멀리는 바다와 지평선까지 훤하게 보인다. 날씨가 좋은 날 한 폭의 그림으로 보이는 푸르른 들판과, 파란 바다는 길 위에 서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도 한다.   

여기저기 옹기종기 솟아있는 오름, 제주의 오름은 360여 개가 있어서 관심이 있는 어느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이름도 모를 지경이다. 

평화로의 이런 분위기 때문에 개통을 하고 초창기에는 CF나 영화촬영의 장소로도 꽤 많이 이용됐던 곳이다.



가면 갈수록 찻장을 때리는 비의 양은 많아지고 세진다.

출발할 때  한두 방울 내려서 가끔씩 돌아가던 윈도 브러시가 이젠 쉴세 없이 돌아간다.


"와우, 안개 봐.. 길이 하나도 안 보이네.."

자욱한 안갯속의 평화로.. 앞의 차들이 안 보인다


내가 평화로에 막 들어서는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탄식이 나왔다. 

아침시간이라 차들이 줄을 이어서 달리는데 모두 비상등과 안개등을 켜고 있다. 


"웬 겨울에 이런 날씨가 다 있지?"


겨울에 눈이 내려서 오가는 일이 막히는 일은 종종 있는데 겨울비에 안개날씨는 왠지 어색하다. 

안개가 심한 날은 바로 앞의 차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탁 트인 길 그냥 달리다가는 교통사고를 당하기가 일쑤다. 이때는 온갖 자기 방어수단을 가지고 서행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도로에 익숙지 않는 제주 초행길의 렌터카들은 길옆에 세워서 잠시나마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평화로 주변 수많은 오름 중에서 내가 이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오름이 하나 있다. 

웬만하게 제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알 수 있는 이름이다. 매년 정월 들불축제로 유명한 새별오름이다. 새별오름은 이제 관광명소가 다 됐다. 들불축제가 없더라도 늦은 가을 억새가 출렁이는 모습은 일품이다. 요사이도 평화로를 오가다 보면 새별오름 등성이를 움직이는 무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오름을 등반하는 사람들의 무리다.  


어쨌든 오늘 평화로는 운전하기에는 낭만이 없다. 최악이다. 

제법 내리는 비와 뿌연 안개로 차선이나 표지판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다. 목적지인 광평으로 가기 위해서는 도로를 달리다가 우측으로 빠져야 하는데 그 길을 놓칠지도 모른다. 이런 날씨에 서귀포를 다녀오다가 간선도로로 빠지는 분기점을 지나쳐서 할 수 없이 제주시까지 갔다가 돌아왔던 일들이 몇 번 있다. 그러기에 괜히 짜증이 나기도 한다. 

쾌청함 속을 달리는 평화로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는 이젠 안갯속에서도 보일정도의 큰 지형지물을 익혀두기로 했다. 오늘 지형지물은 새별오름이다. 새별오름을 지나서 첫 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빠져서 화전마을로 향하면 된다. 


제주에도 예전에 화전을 하면서 살았던 곳이 있다고 한다.

서로를 연접하고 있는 광활한 지역이나 행정상으로는 아주 분리된 지역이다. 애월읍 봉성리와 안덕면 광평리다. 그 두 마을 사이에 있는 길을 달린다. 

이 길은 평화로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다. 화전로에 들어서는 초입 길양옆에는 큰 잣나무들이 울창하다. 나무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기웃거리면서 얼마 안 가 주변분위기와는 다른 거대한 정문이 나온다. 과거 몇 년간 수없이 많은 뉴스와 얘깃거리를 남기면서 제주 중산간 지역의 "발간 지붕집"으로 불리는 아덴힐 리조트 & 골프장이다.  제주를 국제자유도시로 만든다면서 투자유치를 한 결과물이다.  2004년부터 평화로위 한라산 자락 99만 8222㎡ 부지에 900여 억 원이 투입돼 18홀 골프장과 클럽하우스, 풀빌라 콘도 91채 등 대규모로 조성된 시설이다. 주변경관하고는 안 어울리게 빨간 지붕으로 조성되면서 제주 중산간의 경관을 해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멀리서 보면 빨간지붕만이 선명하게 보여서 모든 사람들이 "어, 저게 뭐지?" 하고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 도로를 달릴 때마다 여긴 제주가 아님을 낯섦을 많이 느낀다. 이런 개발행위 때문에 얼마 전에는 평화로 위에는 건축행위를 못하게 하자는 자치법규 안이 만들어지면서 논란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한라산자락의 빨강 지붕집인 아덴힐 리조트(네이버지도)


화전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또 하나의 거대한 정문이 나온다. 

타미우스 골프장 & 빌리지다. 또 하나의 화전마을 속 이물질인 느낌이다.


나는 여전히 밀도를 더해가는 빗속을 달린다.

짙은 안갯속을 달리는 시간 내내 비슷한 기분이다. 


" 한라산 속 이 길은 왜 이렇게 잘 만들어 놓은 건지?" 

왜 정문 앞은 몇 대의 차가 교행을 하거나, 좌우회전을 하더라도 문제가 없게 인터체인지(?)식으로 멋있게 만들어 놨는지 모르겠다. 


탁 트인 평화로를 달리던 상쾌한 기분이 이 길에만 들어서면 뭔가에 갇힌 느낌이다. 길 양옆 울창한 나무숲은 뭔가를 가리는 듯하다.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선인 것 같기도 하다. 무대 위의 거대한 장막과도 같다. 


이런저런 생각과 잡념 속에 차는 왕이메 오름과 목호의 난의 발발 지였던 호명목장을 끼고 마을로 내려간다. 

길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비는 더 많이 내린다.


"아! 왜 이렇게 겨울비가 많이 내려.. 안갯속을 뚫고 겨우 왔네요.."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반가움의 인사를 날씨를 원망하는 말투로 날렸다.  

"요즘은 겨울이 아니여, 날씨가 너무 이상해.. 밭에 심어놓은 작물들이 다 죽어버려.."

"나도 집에서 먹을라고 몇 개 심어 놓은 상추가 다 말라죽었어.."  역시 세상을 원망하는 듯한 대표님의 응답이다. 

겨울비가 내린다. 축축한 날씨다. 

모든 게 안갯속에 갇힌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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