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있는 자연인데, 올 때를 잘못 찾은 듯 겨울날 안개비가 촉촉이 내린다.
며칠간 날씨가 그렇다. 오늘도 아침잠을 깨면서 밖을 본 풍경은 뿌옇다.
한라산의 모습이 옅게나마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3주간 빡센 일정을 마치고 난 터라 뭐를 해야 할지 방향 감각을 못 잡고 있는데
날씨까지 우울하니 더 기운이 처진다.
흔히들 이런 날은 파전에 막걸리 한잔하는 날이라고 한다.
아마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우리 조상님들이 일상을 그려낸 말이 아닌가 한다. 사실 비가 오면 농사를 하는 사람들은 별반 할 게 없어진다. 지금에야 하우스가 생기고, 비가림 시설들이 많으니까, 비가 오더라도 농촌은 바쁠 수 있지만 예전에는 모두 농지 농사가 아닌가? 타의에 의해서 주어지는 천금 같은 휴일이다. 그래서 집에서 막걸리나 한잔하면서 이웃과 밀렸던 얘기를 하자는 뜻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야, 파전에 막걸리 한잔하면 딱 좋은 날이다.." 라고 말이다.
시대가 많이 변하고 사회환경이 바뀌었건만 비가 오는 날 여전히 파전에 막걸리 한잔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인지, 게으른 농부라는 것을 입증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가 오는 날은 농부에게는 이모저모로 반가운 날이다.
이런 날 기운이 처지는 건 사실이다.
차라리 비가 소리를 내면서 율동 있게 내려주면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을 만도 한데, 안개 속에 촉촉이 비가 내리는 날은 그냥 을씨년스럽다. 안개 속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세상 모습과 옛날 일들이 하얀 스크린 속에 감추어진 느낌이다. 옛 추억이 안개 속을 뚫고 불쑥 나타나서 나를 당황하게 할 것만 같다. 문득 생각나는 음악이 있어서 유튜브를 열고 음악을 들어본다.
안개비는 소리없이 꽃잎마다 스미네
이미 잊은 옛날 일들 내게 일깨워주네
한때 사랑한 한때 미워한
수많은 얼굴들이 내게 떠오네
안개비는 소리없이 메마른 내맘 적시네
세모와 네모의 1979년 음악 안개비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다니던 대학교도 휴학하고 친구가 좋다고 막 방황하던 시절이다.
조용하고 취향에 맞아서 통기타를 치면서 자주 불렀던 노래다.
어쩌면 노래 가사는 그때가 아니고 지금이 더 어울릴 법도 하다.
그때 무슨 연유로 이 노래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20살 시절, 시장통 친구 집 옥상에서 여러 친구들이 통기타를 치면서 재잘거렸던 그 추억이 떠오르는 날이기도 하다.
안개비가 내리는 날, 제주에서의 운전은 고생길이다.
특히 한라산을 횡단해서 서귀포로 가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날 서귀포로 넘어가는 도로는 안개 속의 그림자다. 도로가 안 보일 정도로 감싸는 안개로 어느 게 길이고 어느 게 오름인지 구분이 안 된다. 안개등을 켜고, 비상등을 깜박이면서 천천히 기어가야 한다.
유독 렌트카가 많은 제주, 이런 날 길가에는 하씨, 허씨, 호씨가 가던길을 멈추고 서있다. 안개때문에 도저히 운전할 수 없는 관광객들이 멈추어선 것이다. 그렇치 않아도 구불구불 급커브가 많아서 초행길 운전자를 괴롭히는 제주의 길인데 안개까지 끼게 되면 멈추어서 잠시 쉬어가는 게 상책이다.
이런 날은 가급적 한라산을 넘지 않는 것이 최상이다.
그러나 부득이한 경우가 있다. 집에 일이 있거나 서귀포에 경조사가 있어서 반드시 가야 하는 경우다. 처음 운전하던 30년 전, 엉겁결에 뛰어든 길에서 잔뜩 낀 안개를 만나고는 크게 당황한 적이 있다. 차를 돌릴 수도 없는 길, 가다 쉬고를 반복하면서 엉금엉금 기어서 평소의 2배 시간이 걸려서 도착한 적이 있다. 그날은 진짜로 몸이 폭삭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한 날이다. 온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사지가 움직일 수 없었던 아픔이 있다.
거의 일주일째 안개비와 보슬비가 교차로 왔다 간다를 반복하고 있다.
꽤나 지루한 일상이다.
서재에서 플레이 리스트에 이 노래 저 노래를 올려보면서 잠시 생각에 젖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