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나는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학교운영위원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참여를 하게 되었다. 자녀들이 모두 학교를 졸업한지라 예상치 못했던 주문이다.
"초등학교 학부모라는 자리를 벗어난 지가 한참인데 내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 많이 변해 버린 교육현장에 대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학교운영위원회에는 지역위원이라는 쿼터가 있다. 학교와 마을과의 협력과 공조를 위해서 학부모가 아닌 지역의 인사 몇 명을 구성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마을과 학교, 마을과 교육이라는 생각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승낙을 했다.
자녀들은 대화 속에서 스스로 제 갈 길을 찾아가기를 바랐다.
나는 자녀들이 학교에 다닐 때부터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제주라는 지역적 한계성을 뛰어넘는 자녀들의 수월성 교육을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다. 공교육에서 지원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해 줄 시장이 없는 제주에서 아빠인 내가 조금이라도 메꿔주기 위해서다.
도서관과 인터넷에서 직접 자료를 찾으면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를 공부했다. 그 이면에 감춰진 진학과 학교의 현실을 알려고 노력했다. 학부모들의 수기를 읽으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인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자녀교육방법과 이유를 알아보고자 노력했다. 좌충우돌했던 많은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제는 내 나름대로의 교육을 보는 시야와 자녀의 교육관이 정리돼 있었다. 자녀들과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많은 얘기를 하면서 지냈다. 그 대화 속에서 스스로 제 갈 길을 찾아가기를 바랐다.
작년 늦둥이 아들의 대학입학을 했다. 자녀 셋의 진학과 인생문제를 같이 고민하던 조력자로서의 아빠의 역할을 무사히 수료할 수 있었다. 자녀들의 성공여부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다. 본인들이 만족하고 행복하면 된다. 많은 시간이 지났을 때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마을의 교육환경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편이다.
우리 마을에는 도내에서 3번째로 많은 학생수를 가진 초등학교가 있다. 마을이 택지개발이 되면서 학생수가 급증했다. 택지개발이 되면서 학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학교부지를 준비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존 마을주민들이 반대와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 설립을 포기했다.
마을의 초등학교는 1930년대 개교했다. 그 자리에서 수십 년을 견디다 보니 변화하는 교육환경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과거 우리 교육현장의 대명사였던 콩나물 교실의 신개념인 콩나물 건물이 되었다. 한정된 건물에 교실을 마구 증축하다 보니 건물에 여유공간이 없어졌다. 특별교실이나 휴게공간이 전부 교실로 이용되고 있다. 그냥 성냥갑을 올려놓은 건물이 되었다. 학교의 교육환경은 극히 불안정하고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많은 게 사실이다. 교육기회의 불평등도 문제이지만 교육여건과 환경의 불평등 또한 중시되어야 할 대목이다.
마을에는 2개의 초등학교가 있다. 매년 250~300명 정도의 중학교 진학 인구가 발생한다. 중학교의 1개 학년을 채우고도 남을 학생수다. 그러나 인근에 중학교가 없어서 신제주권에 있는 학교로 시내버스를 타고 통학을 해야만 한다. 중학교 설립은 오랫동안 마을 주민들의 숙원이었다.
2015년 마을에서는 이 숙원사업을 해결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나도 이 위원회의 실무책임자로 참여를 했다. 마을의 교육환경을 분석하고, 관련 제도와 법규를 파악해서 문제점과 필요성을 찾았다. 마을에 학교가 필요하다는 논리와 자료를 만들고 교육감과 교육당국을 설득하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유치가 결정된 21년도까지 사무국장으로 6년간 활동을 하면서 지역의 교육현안에 대한 관심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부지매입문제로 학교가 개교하지는 못했지만 지역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교육현안을 해결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 법은 보호해 주지 않는다”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
마을의 크고 작은 현안을 다루면서 자주 느끼는 생각이다.
10여 년이 지난 교육현장은..
2009년 늦둥이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나는 1년 동안 학부모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학교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운영위원회는 거의 매월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워낙 심의안건이 많아서 매월 하지 않으면 제때 진행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회의 장소는 학교 도서관 한편이었다. 회의하는 날이면 어린이들이 도서관을 사용 못하도록 하고 회의를 했다. 그나마 당시의 기억으로는 매 안건마다 열띤 토론과 의견개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십수 년이 지난 올해 회의는 참석 때부터 많은 기대와 궁금증이 있었다.
올해 학부모위원은 지원자가 많아서 선거를 했다던데 어떤 학부모들이 참석을 할까?
회의 진행이나 논의과정은 어떻게 변했을까?
교원위원들의 태도는 예전하고 어떻게 다를까?
많은 상상과 기대를 가지고 첫회의 참석을 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장소도 위치만 바꿨을 뿐, 비좁은 어린이 도서관 한 모퉁이였다. 회의 자체는 더욱 보수화되고, 소극적으로 되어 있었다.
위원들의 각자 소개도 없었다. 부르면 일어서서 꾸벅 인사만 할 뿐이다.
위원장 선출은 교황선출 방식이다. 전체 위원 명단을 놓고 원하는 사람을 기표하는 방식으로 선출했다. 위원장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없는 투표방식이었다.
"제도가 이렇게 바뀌었나?"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품엇던 의문이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처음으로 이렇게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결정은 학교에서 했다.
1시간여 진행된 본회의 동안 처리해야 할 안건은 무려 13건에 자료는 150여 페이지나 되었다. 5분에 1건 꼴이다. 제대로 운 질의와 답변을 할 시간이나 토론의 시간이 없었다. 마치 잘 짜인 각본에 의해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사실 상정안건 내용은 거의 교육청 지침이나 제도로 이미 만들어진 것들이라 학교 현장에서 수정할 것은 없다. 기껏해야 날짜를 정하는 일, 방과 후 프로그램 정도를 정하는 일 정도다. 그 외 내용 대부분은 표준안이고, 전문적인 내용이다. 실제로 논의될 것들은 없고, 운영위원들에게 알려주고, 궁금증을 해소하는 차원의 설명 정도라는 인상이다.
1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교육의 현장이다.
우리는 흔히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한다.
"세 살 버릇 여든 살까지 간다" 는 말이 있다.
지금 학교현장에서 배우는 어린이들이 지식과 태도가 우리나라의 50년 후를 결정한다.
나도 강단에 서지만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한다는 것은 늘 어렵고 힘들다고 느낀다.
항상 첫 시간이 흘러가기 전까지는 긴장의 연속이다.
무릇 가르침에는 진실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아는 것 중에서 내가 실천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참모습일 것이다.
또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己所不欲,勿施于人)"는 논어의 구절을 실천에 옮기는 것도 교육의 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