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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보로 Oct 27. 2022

상처를 어루만진 것

22.10.21 (금)

발치한 치아에 소독을 받기 위해 치과에 갔다. 금으로 크라운 한 치아가 속에서 다 썩어서 더 이상 살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치과 가는 게 너무 싫어서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될까 싶었는데 염증이 신경을 타고 들어가면 더 끔찍한 상황에 이른다고 해서 뽑기로 했다. 잇몸뼈도 많이 녹아서 뼈이식도 같이 진행해야 한단다. 모든 공정이 끝나고 새 치아가 생기려면 1년. 이럴 땐 부실한 머리숱보다 치아가 더 서럽다.


발치의 순간은 스펙터클한 액션 영화. 덩치 큰 선생님도 한 번에 마무리하지 못하고 쉬었다 진행할 만큼 힘들어하셨다. 한 손으로 턱을 잡고 집게를 들어 올리는데 이가 뽑히기 전에 턱이 뽑히지 않을까, 공포가 몰려들었다. 순간 요가원에서의 수행을 생각하며 호흡을 최대한 부드럽게, 머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호흡에 집중하니 공포가 덜 했는데, 아내와 라마즈 호흡법을 훈련하던 기억이 오버랩되었다.(히히 후~ , 웃음소리 아님)


출산을 자축하는 우리들


소독을 마치고 간호사님께 커피를 마셔도 되는지 물었는데 간결하게 '별로 좋을 건 없어요.'라고 하셨다. 왠지 모를 반항심이 인다. 때마침 근처에 볕 좋은 카페가 있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로스터리 카페라 직접 볶은 커피가 고소고소, 이틀 동안 부족했던 카페인이 들어오니 세상 행복했다.


책꽂이에 배우 봉태규 님 쓴 에세이가 있었다. '더 퀘스트'에서 펴낸 <우리 가족은 꽤나 진지합니다>. 태규 님은 우리가 창신동에 살던 시절 자주 가던 카페 슬로 가든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하시시박님과 연애하던 시절이었던 거 같은데 두 사람의 다정하면서도 편안한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세월이 흘러 벌써 두 아이에 아빠가 되다니 애는 우리가 먼저 났는데 훨씬 성숙한 아빠가 된 것 같아 묘한 경쟁심이 인다. 한 시간 정도 푹 빠져서 읽었을까, 전화벨이 정적을 다.  


"오빠 선생님이 수행은 못하더라도 차담이라도 함께 하자고 하시네."

한참 책에 빠져있던 순간이라 잠시 고민했지만 선생님이 내려주는 보이차 생각에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책은 다시 와서 보면 되지머^^;



"선생님 어제 발치의 현장에서 요가 수행한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이틀 나오지 않으셨던가요?"

"그..그렇긴 한데 호흡에 집중하고 릴랙스 하려고 했더니 후유증이 확실히 덜한듯해요."

선생님은 빙그레 웃고 계셨지만 정확한 의미는 파악할 수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사라스와띠'란 이름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인데 하천, 호수의 여신으로 숭배되다가 나중에는 학문, 예능, 웅변, 지혜를 주관하는 신으로 불리었단다. '액체류를 좋아하시는 것도 호수의 여신이라서 인가?!' 역시나 내 속을 꽤뚫어 보신 듯 말씀하신다.

"이름을 받을 때는 보통 그 사람을 채워줄 수 있는 이름으로 받아요. 잘하는 부분 말고 부족한 부분을."


니콜도 변화를 느끼는 부분을 말했다.

"선생님 저는 그러면 안돼 하면서도 폭식을 자주 하는 편이었는데 그 부분이 좀 덜해진 것 같아요."

"음식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아요. 강박은 폭식으로 이어진고 결국 악순환이 됩니다. 나는 언제든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요."

니콜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사람' 부분에 밑줄을 주욱~ 긋는 표정이다. 집에 가는 길에 니콜이 말했다.


"오빠 요가는 느리게 할수록 잘한다고 해서 좋아. 어릴 때 엄마한테 느리다고 엄청 혼났거든. 회사에서도 느려서 고생했고, 근데 요가는 천천히 할수록 잘한다고 하시네. 천천히 하되 어는 순간 과감하게. 몇 일째 잠도 푹 자고 나랑 잘 맞는 것 같아."

창가로 들어온 햇살이 니콜의 볼을 감싸 한 없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2022.10.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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