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보로 Oct 27. 2022

내 안에 숨어 있는 나

22.10.19 (수)

첫 수련의 고통이 떠올라 쉬는 날도 몸을 풀었다. 샤워를 마친 딸이 허리를 꺾은 채로 낑낑거리는 아빠를 보더니 가소롭다는 듯이 따라 한다. 나보다 30도 이상은 더 꺾이는 거 같다. 승리감에 젖어 신이 난 딸은 더 어려운 걸 시켜달라고 보챈다. 몸은 풀린 거 같은데 씁쓸한 패배감을 안고 잠들었다.


요가원에 들어서는 발걸음에 예습하고 온 학생처럼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저께보다는 분명 수월하겠지(주 3일이다).

시작과 함께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전혀 다른 자세들이 연달아 이어지더니 3분 버티기에서 5분으로 시간이 늘어났다. 나도 모르게 '씨바' 욕지거리를 할 뻔했다가 혹 이 욕의 어원이 '시바'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힌두교 파괴의 신).  그 짧은 순간에 욕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있는 내가 왠지 대견했다. 이 것 또한 수련의 효과가 아닐까?




영겁의 시간이 지나고 평온한 차담 시간. 다친 허리 때문에 워낙 고생을 하고 살았던지라 자세를 취할 때 겁먹게 된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신다(빙그레 할 때의 입모양과 둥근 안경, 곱실거리는 머리까지 둥근 것들이 어우러져 편안해진다.)

"수술로 허리디스크 한 마디를 제거 한 사람, 무릎 연골이 없어 한쪽 다리가 가는 사람. 진짜 별의별 아픈 분들이 많으세요. 그런데 앉기도 힘들어하던 분들이 꾸준히 수련하더니 어느 순간 어려운 자세도 무리 없이 해내더라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 다 할 수 있어요."


평소 스트레스를 받으면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는 아내에게 말씀하셨다.

"힘들면 미간에 인상을 쓰게 되는데 펴야 해요. 인상이 펴지면 인생도 같이 펴지게 되어있어요. 신기하게도 요가를 시작하고 하는 일이 잘 되는 분들이 많아요. 의식적으로 미간을 펴는 훈련을 하면 선순환이 일어나서 삶도 펴지게 됩니다."


"요가를 하다 보면 꾹꾹 눌러놨던 것들이 터져 나올 때가 있어요. 갑자기 우는 사람도 있고, 자기도 모르게 흔들거리며 혀를 날름거리는 사람도 있고, 화장실로 뛰어가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어요. 없었던 조울증이 터지고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도 있어요."

"그럼 요가에도 부작용 같은 것이 있는 건가요?"

"부작용이라기보다 참 나를 찾는 과정인 거지요. 눌러 놨던 내가 밖으로 나오니 혼란스러운. 수행을 통해 잘 다뤄가면 괜찮아져요."




가만히 선생님과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내가 입을 땠다.

"인스타그램에서 보면 예쁘고 몸매 좋은 요가 선생님들이 멋진 자세로 피드 올린 게 많은데 그런 곳은 왠지 부담스러웠어요. 선생님은 복장도 편안하시고 그런 자세도 잘 안 보여주시니까 오히려 좋아요."

"처음부터 자세가 잘 되는 사람이 있어요. 선천적으로 유연한 몸을 타고 난 거죠. 어찌 보면 축복이기는 한데 지도자로서는 힘들 수 있어요. 자기는 처음부터 잘 됐으니까 정말 쉬운 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저게 왜 안되지?! 하고 말이죠."

"저도 처음에는 엉망이었어요. 제가 안됐으니까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알아요. 그래서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시범도 보이지 않아요. 대신 말로 설명해요. 눈은 감게 하고요. 소리에 집중하면서 내 동작을 그려보는 훈련을 시키는 거지요.

워낙 시각적 정보에 익숙한 채로 살다 보니 처음에는 이런 훈련을 힘들어하세요. 손끝을 펴라고 해도 자기 얘기를 하는지도 몰라요. 그럼 눈 뜨고 손끝을 한 번 보세요, 하는데 보고도 그걸 잘 못 펴는 분들이 계세요. 특히 에고가 강하신 분들이 그래요. 그런 분들은 몇 번을 말해도 자세가 잘 안 바뀌어요.


이 자세만은 아내보다  잘한다.


선생님께서 엎드린 채로 팔로 바닥을 짚고 허리를 뒤로 꺾으며 낑낑거리는 우리 부부를 찍어 보내 주셨는데 내가 니콜보다 자세가 좋다고 하셨다. 이분이 나를 놀리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정말로 사진을 보니 니콜의 닫힌 어깨에 비해 내 어깨가 열려 보이는 거 같긴 하다. 니콜은 에고가 강하고 남 말을 잘 안 듣는 편일 것 같고, 상체 쪽이 유연하고 어깨가 잘 열리는 나는 수용력이 좋아서 잘 받아들이는 사람일 거 같단다. 요가원이 잘 안 되면 그대로 돗자리를 까셔도 될 분이다.


내일은 다 썩어 녹아버린 어금니 하나를 뽑아야 해서 다음 수업을 못 갈 거 같다고 말씀드렸다. 디스크가 없고 연골이 없는 분도 다 한다고 해서 나올까 했지만, 수련 중에 실밥이 터져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피차 하루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틀 동안의 수련으로 느낀 것들을 어금니를 뽑는 순간에 적용해 보아야겠다.


2022.10.19 (수)


매거진의 이전글 숨어있던 감각아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