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의사의 한의학 이야기
앞서 연이은 글에서 걷기의 중요성을 한의학 관점으로 설명하고자 '비주사말(脾主四末)'이라는 한의학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비(脾)가 인체의 사지를 주관하니 팔과 다리를 움직이면 소화기가 발동된다는 뜻인데요. 이번 글에선 걷기와 관련하여 새로운 언어를 소개드리려 합니다. '사려상비(思慮傷脾)'라는 용어이지요.
이는 생각 많으면 비(脾)가 상한다는 뜻으로 근심, 걱정할 경우 소화기에 질병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소화질환의 여러 증상 중에서 위(胃)가 경직되거나 활동이 무력하여 벌어지는 소화불량과 달리 식욕이 없거나 눈으로 음식만 보아도 속이 더부룩해져 헛배 부른 증상은 비기(脾氣), 즉 비(脾)의 기운이 손상된 문제입니다.
과식이나 급하게 먹어 위(胃)에 탈이 나서 생긴 소화불량은 소화제로 쉽게 해결되지만 비(脾) 기운의 손상은 약으로 금방 치유되지 않습니다. 특히 사려(思慮)에 따른 비기(脾氣) 손상은 근심, 걱정을 줄여야 치료되는데 생각의 통제는 매우 어렵지요, 이에 사려상비해서 야기된 질환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걷기의 위력은 여기서도 발휘됩니다. 사려상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죠. 이는 걷는 행위로 생각을 통제할 수 있어섭니다. 걷기에 집중하면 근심, 걱정이 잊혀지니까요. 마음의 매듭은 마음으로 풀리지 않습니다. 생각을 생각으로 멈출 수 없는 것과 같지요. 마음 문제는 오로지 몸으로 해결되니 생각 역시 몸을 움직여야 통제됩니다. 근심, 걱정을 멈추겠다고 가만히 앉아 머리 굴리면 마음 매듭이 오히려 더 꼬여서 근심과 걱정이 깊어집니다. 이런 경우엔 밖으로 나와 몸을 움직여 걸어야 합니다.
걸으면서 생각하지 마세요. 걷는 움직임에만 집중하세요. 그래야 사려상비가 걷기로 치유됩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 귀에 들리는 소리, 피부에 느껴지는 바람, 발바닥의 감촉 등 몸의 감각에 집중해서 걸으면 근심, 걱정 일으키는 사려가 멈춥니다. 이러한 감각 집중이 익숙치 않은 분에겐 암송 걷기를 권합니다. 저는 매일 감각 집중에 앞서 암송 걷기를 합니다. 인체에서 12경락이 흐르는 부위와 각각의 중요 혈자리들을 암송하며 걷는 것이지요. 암송과 함께 해당 경락과 혈자리를 연상하고, 감각적으로 느끼면서 걷습니다. 감각 집중과 암송 걷기를 겸한 셈이죠.
신앙인은 자신이 믿는 경전을 암송하며 걷는 것도 좋겠네요. 이러면 걷는 행위가 운동을 초월해 종교적으로 승화됩니다. 종교적 승화는 근심, 걱정의 사려를 진정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요. 백마디의 말보다 한번의 실천이 중요하니 사려상비를 포함하여 생각 많아 몸이 아픈 분들은 감각에 집중하거나 암송하면서 매일 꾸준하게 걸어 보세요. 놀라운 치유 경험을 하실 겁니다.
제주 관자재한의원 특진의 손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