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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14. 2016

진짜 자율 가짜 자율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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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自律)’이라는 단어처럼 타락해 버린 말이 또 있을까. ‘자율’은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나는 진정한 자율의 조건이 이 사전적 의미 속에 담겨 있다고 본다. 외부로부터 오는 영향력이나 통제로부터의 자유, 자기 스스로 원칙을 세워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자율의 고갱이다.


구조의 지배 아래 있는 주체는 진정한 자율을 누리기 힘들다. 시스템의 구속이 온존한 상태에서 자기 스스로의 원칙을 내세우는 일은 힘들다. 자율은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마구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대상을 보이지 않게 구속하고 지배하려는 교묘한 책략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     


이명박 정부 이후 학교 현장에 자율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2008년 교과부가 발표한, ‘단위학교 책임경영제’에 따른 ‘학교 자율화 조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조치는 학교에 대한 교육 당국의 각종 규제를 가급적 자제하고, 교육 당국이 가지고 있던 많은 권한을 단위학교로 넘겨주는 것을 의미했다. ‘평범한’ 공・사립고등학교들 앞에 ‘자율’이라는 말‘만’ 붙인 각종 ‘자율형 학교’들이 생겨났다.


표면적으로 자율형 학교 정책은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을 강화한다. 단위 학교의 자율적 교육 결정권을 보장해 주는 것 같다. 이면의 의도도 실제 그러했을까.


나는 현재 자율형 학교들이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율이 가짜라고 본다. 진짜 자율은 주체가 스스로 싸워 얻어내는 것이다. 구조와 시스템의 통제와 지배 ‘아래’ 있는 학교가 스스로의 자발적인 의지와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것이어야 한다. 지금 자율형 학교가 누리는 자율은 ‘위에서’ 일방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자율형 학교 정책의 이면에서 학교 교육의 책무를 일방적으로 학교에 전가하는 책임 방기를 읽어내는 까닭이다.


자율학교의 자율이 가짜처럼 보이는 까닭이 또 있다. 여러 차원에서 자율이 학교로 넘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교육부로부터 권한을 넘겨받은 학교장의 힘만 전보다 커졌다. 질식 상태였던 민주주의는 더욱 압박을 받았다. 학교교육의 공공성이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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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25일 전라북도의회가 재적의원 43명 중 35명의 압도적인 다수로 <전라북도학생인권조례(안)>(아래 ‘<전북학생인권조례>’)을 통과시켰다. 햇수로 3년 만이었다. 그 전에 <전북학생인권조례>는 전북도의회 교육상임위원회에서 네 차례나 부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조례 도입 여부를 두고 한창 논란이 일 때였다. 교육부가, (전북학생인권조례가) “초중등교육법시행령 등 상위 법령을 위배하는 것이 일부 있으며, 일선 학교의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며 전북교육청에 재의 요구를 하며 딴지를 걸었다. 당시 교육부는 학교에서 하는 소지품 검사를 상위 법령이 보장하는 단위 학교의 자율성과 관련되는 사안으로 보았다. 전북학생인권조례는 이러한 소지품 검사를 제한하기 때문에 단위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논리를 들었다.


교육부가 소지품 검사 문제를 단위 학교의 자율성 침해 논리와 연결한 것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전에 두발, 복장, 휴대전화 사용 등 학생생활에 관한 사항을 학칙으로 정해 운영하도록 하는 <초중등교육법시행령>을 개정하였다. 학생들의 머리와 복장에 관한 학칙을 꼭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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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생 물건을 검사하는 일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것이 어떻게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교육부는 소지품을 검사하고 안 하고의 문제를 교장의 자율적인 판단 대상으로 보고 학교가 알아서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모든 학생이 잠재적 범죄자이거나 불량 학생이니,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차원에서 소지품 검사를 자율적으로 하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싶었을 수 있다.


학교는 공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적 공간이라는 역설적 성격을 갖다. 나는 수업에 참여하는 개별 학생들에게 공적 공간으로서의 교실 일부가 사적 공간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역설의 공간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내면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교사와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 현실은 어떠했고, 지금 어떠한가. 많은 학교에서 학생들은 일상적으로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소지품 검사나 개인 물품에 대한 압수를 당했거나 당하고 있다. 여전히 학생들 뜻과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정해진 교칙에 따라 특정 두발과 복장을 강요받는다. 무슨 색의 양말을 신어서는 안 되고, 어떤 모양과 디자인의 옷은 금지시킨다.


이것들이 교육 활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두발과 복장이 ‘교육적으로’ 그렇게 중요하다면 초등학생은 왜 대체로 가만히 내버려 두는가. 가장 깊고 넓게 공부해야 할 대학생들의 두발과 복식은 왜 자유롭게 놔 두는가. 공부를 방해할 텐데. 초등학생은 어린애고 대학생은 성인이어서 그러나.


학교의 자율성은 자발성을 통해 실현된다. 이때의 자발성은, 학교 구성원이 서로에게 당당한 주체이자 개인으로 대접받고, 스스로 그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명확하게 인지한 후에야 성립된다.     


5     


몇 년 전 전북학생인권조례 반대토론에서 전북도의회 김 모 교육의원은 “현재 조례안 내용을 보면 학생이 ‘갑’이고 교사는 ‘을’이다. 우리 선생들은 순수하다. 작은 충격에도 견디지 못한다”라고 말해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다. 주변을 보면 그가 말한 ‘순수한’ 선생 같은 이들이 교사(학교)와 학생 관계를 갑을관계로 본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학생과 교사는 모두 갑이거나 을이어야 한다고. 학생과 교사는 함께하는 ‘동등한’ 교육주체들이다. ‘갑을관계’라는 현실 논리가 학교 시스템을 지배하는 한 진정한 의미의 자율이 설 자리는 생겨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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