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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Dec 16. 2016

박근혜가 만들어준 고급 한자어 수업시간

1     


“아빠, ‘퇴진’이 뭐예요?”     


6살 막내가 물었다. 어제 오후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차 실내 거울로 뒤쪽을 보았다. 막내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문구가 새겨진 펼침막 끝자락이 창문 너머로 살짝 보였다.      


지난달 26일 1박 2일 일정으로 광화문 촛불집회를 다녀왔다. 구호가 취향(?)에 맞았을까. 막내는 그날 밤 느지막이 숙소에 돌아와서도 ‘박근혜 하야, 박근혜 하야’를 외쳤다. ‘하야’와 ‘퇴진’의 뜻을 알려 주었다. 그때는 한귀로 흘려 들었나 보다.     


“하는 일을 그만두고 물러난다는 뜻이야.”
“하야는요?”
“하야도 퇴진과 비슷한 말이야.”
“그런데 왜 물러나요?”
“잘못한 일이 많거든.”
“무슨 일을 했는데요?”    

 

6살짜리에게 ‘직권남용’이니 ‘뇌물죄’니 하는 말을 쓸 수 없었다.     


“응. 박근혜 할머니가 힘이 아주 센 사람인데, 그 힘으로 다른 사람들 돈을 빼앗었어.”
“나쁜 짓 했네.”     


막내가 주저하지 않고 대꾸했다.   

  

2     


오늘(16일)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탄핵심판 피청구인 자격으로 국회의 탄핵사유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한다고 한다.      


국회 탄핵안에 명시된 탄핵 사유는 모두 13건이다. 헌법 위반 5건, 법률위반 8건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박 대통령 측은 이들 탄핵 사유에 대해 모두 ‘무죄’를 주장하면서 반박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몇 차례의 대국민담화를 통해 ‘무죄’를 강변했다. 국정농단은 최순실 씨 개인 비리로 몰았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대한 대기업 모금 압력은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 “사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지나가는 소도 웃을 얄팍한 변명이다.   

  

3     


앞으로 펼침막들에 어떤 말들이 올라올까. 모든 펼침막을 숨길 수 없고, 요즘 길거리 글자 익는 재미에 푹 빠진 막내 눈을 가릴 수 없으니 또 어떤 질문을 해올지 모른다.    

  

얼마 전에는 초등학교 5학년 딸에게 ‘비선’, ‘농단’이라는 말을 설명하느라 한바탕 ‘생쇼’를 했다. 학교의무교육 시스템을 5년간 경험하면서 하나의 조직과 시스템이 굴러가는 원리를 조금은 깨닫고 있는 아이에게 ‘비선 실세’의 ‘농단질’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광화문 광장에서 ‘떼창’을 부르다 ‘탄핵’이 무슨 말이냐는 초등학교 1학년 아들 앞에서 난감했던 적도 있다. 아이는 “소추(訴追)가 곤란한 대통령, 국무 위원, 법관 등의 고위 공무원이 저지른 위법 행위에 대하여 국회에서 소추하여 처벌하거나 파면”하고, “어떤 잘못의 실상을 논하여 책망”한다는 뜻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잘못을 했으면 곧장 벌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면서 말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응수해야 했을까. 나로선 잘못했으면 경찰에게 혼나야 한다는 아이의 단순 소박한 해설을 들으면서도 딱히 더 해 줄 말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고급 한자어 공부 옴팡지게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덕분이다.

조금 켕기는 구석도 있다. 유행하는 말들이 대체로 전근대적인 왕조 시대나 권위주의적인 분위기가 물씬 난다. 어른들이야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지만 우리말에 대한 감성과 감각을 기르기 위해 좋은 자극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별로 좋을 것 같지 않다.

여하튼 아이들 머릿속 어휘 사전을 두툼하게 해 줄 테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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