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41) 학년 문집을 엮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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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쓰지 않으면 손가락에 좀이 쑤신다.
수년 전 <오마이뉴스>에 한참 글을 올릴 때였다. 내가 쓴 글이 정식 기사로 채택되어 여러 사람에게 읽히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쓰고 싶은 글감이 무시로 떠올랐다. 글감에 맞는 ‘멋진’ 문장이 수시로 머리를 휘감았다.
차를 운전하고 있는 중에도 그럴 때가 있었다. 나는 후닥닥 글감을 풀어 거친 뼈대를 만든다. 휴대전화 ‘음성녹음’ 앱을 열어 말을 뱉어낸다. 글을 관통하는 열쇠 문장들이 떠오른다. 앞뒤를 연결해 하나의 문단을 만들어 역시 말로 뱉어낸다.
글이 글을 만드는 것 같다. 글쓰기를 자주 하다 보니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궁리한다. 그런 생각과 궁리가 글을 만든다. 그렇게 나온 글이 또 다른 생각과 궁리를 가져온다. 삶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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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학생들은 별로 그렇지 않는 것 같다. 국어 선생이라 수업 중에 글쓰기 활동을 제법 하는 편이다. 글쓰기 활동을 소개하면 고개부터 젓는 학생들이 많다. 어떤 학생들은 원고지를 앞에 놓고 한 시간 내내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런 학생들을 보면 의기소침해진다. 자연스러운 글쓰기를 유도하지(?) 못하는 내 능력이 부끄러워진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학생들을 괴롭게 하는 게 아닌가 돌아보기도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새로운 글쓰기 방법을 더 궁구하여 학생들과 함께 글쓰기 활동을 부지런히 해 볼 생각이다. 학생들이 단 하나의 문장, 단 하나의 단어를 연필로 새기는 과정에서 미처 살피거나 따지지 못한 생각과 궁리가 학생들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지나가리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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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학기 초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쓴 글들을 모아 문집으로 엮어낸다. 여름방학 중 경험한 인상적인 일들을 써보자고 했다. 학생들은 가족과 친구와 함께, 또는 홀로 보낸 켜켜의 시간들을 소박한 문장들에 담아냈다.
각 학급 반장과 몇몇 친구들이 초벌 입력한 원고를 열어놓고 겨울방학 내내 짬짬이 편집 작업을 했다. 거창하게 ‘편집’이라고 표현했으나 구문들 간의 연결 관계나 문장성분들 간의 호응관계를 바로잡고 오자나 탈자를 찾아내 고치는 수준이었다.
그건 고도로 지적(?)인 작업이 아니다. 그러나 힘들었다. 무엇보다 대다수 글들이 색깔이 비슷했다. 다양한 글들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흥이 별로 없었다. 빛나는 성찰의 순간이나 날카로운 통찰의 계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육하원칙에 충실한 무미건조한 문장들이 15세기 언해문(일종의 번역문이다.) 식의 장문체로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하고 ~하니 ~해서 좋았다’ 식의 상투적인 구문들을 보고 정리하는 일이 솔직히 ‘정신 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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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때 다들 힘들어했다. ‘인상적인’ 일이 없었는데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나날이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하고 왔는데 그런 걸 써도 되냐고 했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써보자고 했다.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 각자의 역사가 되니 그걸 적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년 문집을 내면서 느낀다. 5년이나 10년이나 20년이 지난 후쯤 이 조그만 책자를 우연히 펼친 어느 날 우리 각자가 중학교 2학년의 빛나는 한 시절을 흥겹게 거쳐 왔노라고, 그 무미건조하고 상투적인 문장들로 미처 드러내지 못한, 단어와 단어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놓은 우리 각자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쓸쓸함이 문득 가만한 이슬비가 되어 굳어버린 뇌세포 하나하나를 조용히 적실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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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생각을 부르고 삶을 부른다. 이 조그만 문집이 우리 모두에게 그런 깨달음을 주었으면 좋겠다.
* 방학 중 힘들게(?) 진행한 문집 편집 작업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이 ‘머리말’을 썼다. 내일쯤 인쇄에 들어가는 문집은 학년을 마무리하는 다음 주 종업식날 학생들 손에 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