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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an 26. 2017

“아빠는 아빠 집, 엄마는 엄마 집으로 가요”

적바림 (3)

1


“여보, 자?”


어젯밤이었다. 7살 막내딸과 함께 안방 침대에 누워 먼저 이불을 뒤집어쓴 아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 바로 아래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큰딸과 둘째인 아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대답 없는 아내 대신 오른쪽에 누워 있던 큰딸에게 물었다.


“딸, 만약 나중에 커서 결혼하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큰딸이 말을 끊었다.


“나 결혼 안 할 건데?”


“만약에 말이야. 잘 들어보고 대답해 줘.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엄마 아빠가 정읍(몇 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께서는 고향인 순천을 떠나 정읍 막내누나 집에서 지내고 계신다.)과 광주에 가잖아.”


“그렇지요.”


“지금 우리는 정읍으로 먼저 가서 명절날 아침을 보내고 오후에 광주로 가. 나중에 네가 커 결혼해서 설 명절이 되었다고 해보자. 그때 네 남편의 부모님이 계시는 시댁에 먼저 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엄마와 아빠가 있는 지금 우리 집으로 먼저 오는 게 좋을까? 어떻게 생각해?”


“저는 별로 상관 없을 것 같은데요.”


나이가 아직 어려 미묘한 신경전(?)을 자아내는, 남편 집 중심으로 돌아가는 명절 풍습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딸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다 별일 아닌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왼편에 누워 이야기를 듣고 있던 9살 둘째가 끼어들었다.


“아빠는 아빠 집으로 가고 엄마는 엄마 집으로 가서 명절 보내고 나중에 우리 집에서 만나면 되잖아.”


“하하하.”


자는 줄 알았던 아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안 잤어?”


내가 물었다. 아내는 은근히 나보고 들으라는 듯 아이들에게 말했다.


“똥준이(둘째 별명) 말대로 해도 되겠다. 각자 자기 집에 가서 명절 편하게 보내고 만나면 좋겠네.”


2


며칠 전이었다. <오마이뉴스> 편집부로부터 결혼한 부부들이 명절을 남편 집(본가, 시댁) 중심으로 보내는 관습(?)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예의 관습에 대해 여자들이 한 번쯤 날카로운 의심(?)을 품을 만하지 않느냐,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 ‘시댁 먼저, 친정 나중’이라는 굳은 틀을 돌아보면 좋지 않겠느냐는 취지를 살려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결혼 13년차에 들어선 지금까지 명절날 아내 집(친정, 처가)에 먼저 간 적이 없다. 처가에는 명절 오후 느지막이 갔다. 본가 우선의 명절 관습은 남자인 내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원고 청탁 통화를 끝내면서 아내 생각을 들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젯밤의 잠자리 대화는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내가 “각자 자기 집에 가서” 운운할 때 조금 서운하기는 했지만 사실 아내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크다. 나는 3남 4녀 중 여섯째, 아들 형제 중에서는 둘째다. 형님과 동생은 각기 하는 일과 사는 곳 문제로 명절 당일에 본가에 오지 못한다. 명절 연휴가 끝나고 올 때도 있다. 그래서 결혼 직후부터 본가에서의 명절 당일 아침상을 우리 부부가 가서 챙겼다.


그런 불가피한(?) 상황 말고도 아들인 나는 관습에 따라(!) 명절 당일(아침)에 부모님과 함께하는 걸 당연하다 여겼다. 그 관습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결혼 후 본가에 먼저 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해왔다.


그러다 수년 전 ‘명절날 처가에 먼저 가는 게 어떨까’ 하고 막연히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명절 아침에 장인 장모님만 식사하시는 게 아내 입장에서는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을까, 내가 내 입장만 먼저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했을 뿐 직접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우리 집 사정이 그랬으니 아내에게 특별히 사정을 구하거나 할 필요를 못 느낀 것 같다. 그러나 아내로서는 그 모든 상황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을 수 있다.


장인과 장모님께서는 슬하에 자식 1남 2녀를 두고 계시지만 명절 당일을 거의 항상 당신들 두 분이서만 보내오고 계신다. 명절날 저녁이 되어야 식구들이 함께 둘러앉는다. 그나마 처남이 직장 때문에 빠질 때가 많다. 그러니 자식들 하나 없이 명절 아침상을 마주하고 앉은 부모님을 생각하는 아내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았다.


3


오늘 아침, 같은 직장(학교) 동료 열두어 분이 함께하시는 온라인 방에 예의 관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 글을 올렸다. 언제가 되었든 어젯밤 아내와 못 다 나눈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러자면 다른 집안 사정을 들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서너 분이 답변을 해 주셨다.


종가 중 종가를 시댁으로 두고 계신다는 박 선생님은 명절 당일 시댁에 안 간 지 10년이 되었다고 했다. 불교 신자이셨던 친정 부모님을 위해 명절날 차례를 지내고 싶다고 시댁에 말씀드리자 흔쾌히 받아주셨다고 한다. 김 선생님은 이를 두고 집안 식구들 모두가 “큰 인심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김 선생님의 시댁은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집안이라고 한다. 손윗동서 두 분 이야기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명절날인데도 그 두 분이 친정에 가지 않으신다는 것. 김 선생님은 “너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하셨다. 각자 결혼한 이후 명절날 한 번도 부모님과 함께 지내지 못한, 서울로 시집 간 우리 큰누나와 둘째누나가 떠올랐다. 큰누나는 지금도 돌아가신 시부모님 때문에 명절에 친정에 오지 못하신다.


최 선생님은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이번 설에는 같은 도시에 사시는 부모님과 서울에 사는 큰형님이 최 선생님네로 와서 명절을 쇠고 있다고 한다. 지나간 어느 해에는 최 선생님 가족이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 큰형님네로 가서 명절을 쇠기도 했다. 그렇게 온 식구가 함께 모여 맛집도 다니고 공원에도 다닌다.


4


얼마 전, 이번 설 명절에 국외로 나가는 사람이 50만 명이 넘는다는 기사를 우연히 보았다. 전통적인 유교의식과 이에 따른 관례적인 문화도 시대 변화에 따라 많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 아닐까.


전통과 관습이 불편하고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지레 싫어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가령 집안에 제사라도 있다면 형제자매들이 오래간만에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따뜻한 혈육애를 느끼는 귀한 시간으로 보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전통과 관습의 이름으로 식구와 친척들이 갖고 있는 여러 다양한 생각과 그들이 살아가는 조건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형편껏 서로의 처지를 챙겨주고 이해해 주는 태도가 중요할 것이다. 부부가 명절을 보내는 장소와 시간의 중심과 기준을 바꿔보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시잔은 <세계일보>(기사 제목: ‘[밀착취재] 사는 게 아무리 팍팍해도 명절만큼은…’,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7/01/26/20170126002271.html)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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