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주자들의 ‘삼디(3D) 논쟁’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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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연히 대선 주자들 사이에서 ‘삼디(3D)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 3월 30일 에스비에스 경선토론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신재생 에너지, 삼디 프린트 또 인공지능 산업로봇 등 신성장 산업을 적극 육성하겠습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문 후보의 ‘삼디’ 발음에 대해 은근히 걸고 넘어졌다. 지난 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용어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발음이 있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스리디 프린터’라고 읽는다.”
삼디 논쟁은 ‘노정객’인 김종인 전 의원에게 옮아갔다. 5일 대선 출마 선언을 한 김 전 의원은 자신의 ‘최첨단 경륜’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다음과 같은 말로 문 후보의 ‘삼디’ 발음을 직격했다고 한다.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 아무나 경영할 수 없다. ‘3D 프린터’를 ‘삼디 프린터’라고 읽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실수로 잘못 읽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하다. 국정 책임자에게 무능은 죄악이다.”
그러자 문 후보가 6일 자신의 트위터에 다음 두 문장을 남겼다.
“우리가 무슨 홍길동입니까? ‘3’을 ‘삼’이라고 읽지 못하고 ‘쓰리’라고 읽어야 합니까?”
격분한 어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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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화가 났다. ‘3D’를 ‘스(쓰)리디’로 읽는 것이 국가 경영 능력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전문가들이 쓰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발음이라고 해서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발상법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국내 자동차 이름 ‘SM5’를 ‘에스엠오’로 읽거나 쓴다. 무선전송 방식을 가리키는 일련의 말들도 ‘이지(2G), 삼지(3G), 사지(4G)’라고 부른다.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도 한글날에‘만’ 한글을 기리는 정부와 사람들의 행태가 못마땅해 일부러 그렇게 한다. 나만의 소심한 ‘복수법’이다.
그렇게 한다고 내게 ‘에스엠오’ 자동차 회사를 싫어해서 그렇게 부르는 거냐, 무선전송 방식에 무지해서 그러는 거 아니냐 하고 힐난하는 이는 없다. 가볍게 웃고 넘어가거나, 오히려 진지하게 자신의 말글살이를 돌아보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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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에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이라는 책을 펴낸다. 문자 표기 원칙을 ‘한글 우선주의’로 했다. 미국 신문 ‘LA Times’를 맨 처음 ‘LA Times’로 했다가 ‘엘에이 타임스LA Times’로 바꾸었다. 두 번째 나오는 대목에서는 ‘엘에이 타임스’로만 표기했다.
한자나 영문자 등 다른 나라 문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으려고 했다. 예를 들어 비교적 널리 알려진 ‘캘리포니아 대학교’니 ‘유엔’이니 하는 하는 말들을 적을 때 관행적으로 함께 쓰는 ‘California’나 ‘UN’을 병기하지 않았다.
세계 최대 교원단체연합조직인 ‘국제교원노조연맹’은 맨 처음에 ‘국제교원노조연맹(EI)’으로 쓰고 두 번째 자리부터는 ‘표기 간소화 원칙’에 따라 ‘이아이’로 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같은 말들도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실은 엄격한 ‘한글 전용주의’를 채택해 쓰고 싶었다. 책에서 한글을 제외한 모든 외국 문자나 외래 기호를 추방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표기 간소화 원칙에 배치되지만 ‘%’를 ‘퍼센트’로 쓴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한글 우선주의’는 일종의 타협책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타협책’이면서 동시에 나만의 ‘저항’ 방식이다. 나는 자동차 회사들이 ‘미르’, ‘번개’ 같은 순우리말 이름이 아니라 ‘소나타’, ‘렉스턴’ 같은 유의 외래어‧외국어 식 이름을 쓰는 게 못마땅하다. 차 뒤꽁무니에 ‘소나타’가 아니라 ‘SONATA’를 박아 넣는 게 좋지 않다.
우리나라 수출기업들이 맨 처음부터 우리 문자 한글을 세계에 자연스레 알릴 수 있는 이름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상상을 하곤 한다. 삼성 휴대전화 전면에 ‘GALAXY’와 ‘은하수’, ‘갤럭시’를 함께 새겨 넣었다면 휴대전화가 덜 팔렸을까. 부질없는 노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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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경봉 원광대학교 교수가 <한글 민주주의>(2012, 책과함께)라는 책을 펴냈다. ‘한글 민족주의’나 ‘언어 주체성’의 문제 등 어문생활의 정치사회적 측면을 다룬 역작이었다. 그 책에서 한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언어 문제에 민족정신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민족정신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는 사회는 국수주의적인 파시스트가 기생하기 쉬운 조건을 제공하며, 이는 언어 문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민족정신이 가치 있을 때는 그 민족정신이 민주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될 때뿐이다.” (95쪽)
그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강박적 찬양이 “한글을 세계의 문자로, 한국어를 세계 공통어로” 같은 무모한 주장을 낳았다고 꼬집었다. 언어와 문자에 대한 비이성적 찬양의 귀결점이 나르시시즘이거나 제국주의적 탐욕이라는 점을 직시할 것을 강조했다.
한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원칙적으로 언어의 문제는 언어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 다만 그것뿐일까.
한 교수는 ‘한자를 쓰면 안 된다, 한글만 써야 한다, 외래어는 고유어로 바꿔야 한다, 한글 표기는 이렇게 해야 한다, 자랑스러운 한글을 세계에 수출하자’ 등의 논쟁 주제들 속에 한글과 관련한 역사적 경험과 상처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과 상처가 언어 문제를 언어의 문제가 아닌 ‘정신’과 ‘가치관’의 문제로 바꾸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언어 문제의 해결은 기본적으로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색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언어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신’과 ‘가치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언어가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의 대부분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앉아 있는 세종은 난데없는 ‘삼디 논쟁’을 보며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우리가, 우리 자신이 쓰는 말글에 담으면 좋을 정신과 가치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3D’를 ‘삼디’로 읽었다고 벌떼처럼 달려들어 쏘아대는 정신과 가치관은 아니리라 믿는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무료 이미지 제공 사이트 pixabay.com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