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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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 새 학기 시작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다. 그 정도면 밀고 당기면서 이루어지는 ‘간 보기’ 시간으로 충분해 보인다. 이제 학급 학생들은 담임이 어떤 성향과 태도를 갖고 있는 교사인지 대충 파악했을 것이다.
교사들 역시 비슷하리라. 다만 교사들에게는 새 학년 초를 보내는 조금 ‘특별한’ 비법이 하나 더 있다. ‘학생들을 잡아라!’ 학생들을 처음 만나 관계 맺기를 시작할 때 지켜야 할 제1 수칙처럼 통용된다. 교사들은 처음 학생들을 만나 그들을 엄정하고 깐깐하게 대해야 한 해 교실 살림이 편해진다고 믿는다.
2
갑식이는 넉살이 좋고 활달하다.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을수는 주변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이 많다. 그것이 지나쳐 민감한 이라면 종종 부담감을 느낄 만하다. 병철이는 꾸밈 없이 말을 하는 편이다. 무심결에 나오는 거친 언어를 조심했으면 싶을 때가 있다.
30평이 안 되는 교실 한 칸에 서른 명이 넘는 15살짜리들이 살아간다. 각기 타고난 천성이 다를 텐데, 태어나 15년 동안 만나고 뒹군 환경 역시 같지 않다.
그렇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 교사들은 주어진 시간 동안 교과서를 가르쳐야 한다. 담임 교사라면 자신이 맡은 반이 다른 반과 암암리에 비교당하는 상황을 겪기도 한다. 교실에, 교사의 마음에 ‘개인’이 여유롭게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다.
학급에 학생이 배정되고 난 순간부터 그 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롯이 담임 책임이다. 갑식이와 을수와 병철이 문제는, 그들이 우리 반에 배정되자마자 담임인 나의 책임이 된다. 담임이 좋은 의미의 ‘개인주의’를 실천하기 어려운 구조가 교실에 퍼진다.
이제 교사들이 휘두르는 일률의 엄격한 잣대가 학생들 위에 군림한다. 일부 학생들이 행하는 ‘저항’이나 ‘도주’나 ‘일탈’은, 그 뒤에 이어지는 그 어떤 크고 작은 ‘저항’이나 ‘도주’나 ‘일탈’도 허용치 않게 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요컨대 처음 학교와 교사에게 ‘찍힌’ 학생은 끝까지 그렇게 찍힌 상태로 간다.
3
이즈음 우리 반 갑식이와 을수와 병철이에 대해 말씀하시는 선생님들이 계시나 보다.
갑식이의 넉살 좋고 활달한 의사 표현이 누군가에게는 감정의 폭발적인 표현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을수가 드러내는 관심 표현이 산만하게 ‘나대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병철이가 내놓는 날선 언어가 실상은 순수한 솔직함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그들을 처음부터 휘어잡고 싶지 않다. 학년 초 교사들의 제1 수칙인 ‘강경 매파’ 전술을 휘두르는 게 부담스럽다. 때로 우리는, 미국의 토머스 암스트롱이 <주의력 결핍 장애 아동이라는 신화(The Myth of the A.D.D. Child)>(1997)에 정리해 놓은 다음과 같은 상이한 관점을 고려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학생을 바라보는 교사의 ‘시선’이 달라지면 그들의 태도나 행동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른 경로를 따르기 때문이다.
(표) 오즐렘 센소이・로빈 디앤젤로(2016), 《정말로 누구나 평등할까》, 착한책가게, 126쪽에서 재인용함.
* 제목 커버의 배경 사진은 무료 이미지 제공 사이트 pixabay.com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