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10대를 아느냐 (55)
1
영수(가명)가 이틀째 지각했다. 평소 지각을 거의 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영수는 내가 조회 중일 때 교실에 들어왔다. 표정이 유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고개를 저었다. 늦잠 때문이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조회를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와 1교시 수업 채비를 했다. 전화기에서 문자 메시지 도착 신호가 울렸다. 철희(가명) 어머니였다. 철희가 늦잠 때문에 학교에 늦게 도착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철희는 간혹 지각을 하는 녀석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오늘 아침처럼 1교시 시작 시간이 다 되도록 지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1차고사 끝나고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 건가. 집에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이런저런 걱정을 안고 수업이 있는 교실로 들어갔다.
2
오후 종회가 끝나고 교실을 나오면서 영수와 철희를 불렀다. 교무실에 함께 가자고 했다. 학년 초 우리 반 학생들과 ‘지각 벌’을 정했다. 아침에 늦은 시간만큼 오후에 남아 ‘특별한 활동’을 하는 벌이었다.
그렇게 정해 놓기는 했으나 딱히 심각하게(?) 지각하는 학생이 없어 거의 사문화된 상태였다. 영수와 철희로서는 난데없는 지각 벌이라고 생각했을 만하다. 뒤따라오며서 짓는 표정이 시무룩해 보였다.
나는 교무실 책상 위 책꽂이에서 《정본 백석시집》을 꺼내 들었다. 책장들을 넘기며 시편들을 훑어 내렸다.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읽으면서 약간의 ‘감상’에 빠질 만한 내용과 분량의 시를 골라 전사(轉寫)하게 할 요량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에 생각이 미쳤다. 시행들의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갈매나무’ 이미지에서 무언가 느끼기를 바랐다. 두 쪽에 걸쳐 있는 시편을 복사해 따로 사본 1부를 준비했다. 책과 사본을 영수와 철희에게 건넨 뒤 내용을 새겨가면서 한 행 한 행 그대로 쓰라고 했다.
교무실에 있던 선생님들이 대부분 퇴근한 뒤였다. 영수와 철희가 연필 궁굴리며 내는 소리가 호젓이 넓은 그 공간에 서걱서걱 울려 퍼졌다. 나는 내 자리에서 두 학생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3
십여 분쯤 지났을까. 영수와 철희를 지그시 쳐다보며 번갈아 물었다. 느껴지는 게 좀 있었니? 영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철희는 내 눈을 향한 채 ‘조금’이라고 대답했다.
영수와 철희는 늦잠 때문에 지각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갈매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서너 문장으로 풀어 이야기했다. 몇 마디 덧붙였다. 지각한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말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말자.
그 십여 분의 시간 동안 영수와 철희의 가슴 한켠에 “굳고 정한 갈매나무” 한 그루가 희미하게 자리잡았기를 바란다.
4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르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저녁 무렵)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1948),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정본 백석시집》, 문학동네,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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