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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un 23. 2016

부모의 ‘합리적’인 선택은 ‘합리적’인가

교육 ‘선택 담론’의 허구성

1    


얼마 전이었다. 친한 선배 교사와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교육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육열’이 아니라 ‘교육욕’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너무 걱정하고 지나치게 간섭한다, 자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운운하며 ‘학부모 비판론’을 펼쳤다. 듣고 있던 선배가 말했다.


“부모들을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부모들이 자식을 그렇게 대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반박하고 싶은 말이 없지 않았으나 그만두었다. 목소리가 높아질 것 같았다.    


2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부모는 자식을 위해 ‘최선’이라고 판단한 ‘선택’을 한다. 가정은 그런 선택을 위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최소 단위의 공동체 공간이 된다. 물론 대개 부모의 ‘권력’이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비민주적 공동체’다.

부모는 이익 최대화를 위해 고심한다. 이웃집 부모가 그런다. 그집 이웃에 사는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자식의 ‘최선’을 위하려 하고 이익 최대화에 몰두한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부모들을 ‘선한’ -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 없이 그저 자녀의 안녕과 행복을 바랄 뿐이라는 점을 전제로 - 이기주의자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가정으로 이루어지는 전체 공동체(사회, 국가)가 어떻게 될까.    


도당이나 파벌의 고립이나 배타성은 그 반사회적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스스로 고립되어, 다른 집단과 충분히 상호작용할 수 없게 하는 ‘독자적인’ 관심을 추구하는 집단이라면 어디에서나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이런 집단의 주요목적은 보다 넓은 여러 관계를 통해서 자기를 개혁하고 진보케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것을 지키는 데 있다. 서로 고립된 국가, 보다 큰 사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사사로운 내부 문제에만 집중하는 가정, 가정이나 지역사회의 관심에서 떠난 학교, 부자와 빈자, 교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별에서 앞서 말한 특징이 나타난다. - 존 듀이(1916; 2015), <민주주의와 교육>, 동서문화사, 99~100쪽.    


가정이나 학교는 언제든 도당이나 파벌이 될 수 있다. 도당이나 파벌이 된 가정은, 듀이 식 표현으로 “생활의 경직이자 형식적 제도화를 조장하고, 집단 내부의 정적(靜的)이고 이기적인 이상을 일으키는”(위의 책, 100쪽) ‘고립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당연히 가정이나 학교가 ‘도적 무리[도당(徒黨)]’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족은 고립된 통일체가 아니라 다른 유사한 여러 집단뿐만 아니라 직업단체, 학교, 모든 문화기관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아가 가족은 정치기구 안에서 적당한 역할을 다하여, 그 대신에 그 정치기구로부터 원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요컨대, 거기에는 의식적으로 전달되어 공유되는 많은 관심이 존재하고, 다른 공동양식과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접촉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 위의 책, 97쪽.    


3    


많은 이가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을 강조한다. ‘다양한 학교’, ‘자율성’, ‘자유’가 따라붙는다. 나는 이명박 정권 시절 추진된 ‘고교 다양화 프로젝트’와 ‘자율학교’ 정책, 현 박근혜 정권의 교육 역점 사업인 ‘자유학기제’가 교육 선택 담론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선택, 다양성, 자율, 자유. 모두가 나름의 고귀한 가치를 갖는 단어들이다. 문제가 없을까.


넬 나딩스 스탠퍼드 대학 명예교수는 <21세기 교육과 민주주의>에서 학교가 실패했다고 보는 사람, 즉 학업성취의 국가적 기준을 권장하고 책무성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학교 선택을 옹호한다고 말했다. 이들이 부모가 자기 아이들의 학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


나딩스는 선택이 민주주의에서 기본적인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는 한 공동체의 아이들을 모두 받아들이는 공립학교(public school)가 민주주의의 요람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회적 분열과 불건전한 경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학부모의 학교 선택을 장려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언론인 토인비는 2002년 <가디언> 지에 영국의 새 노동당 정부가 취한 교육정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모들은 ‘차이’와 ‘적성’ 그리고 ‘선택’의 진짜 의미를 금방 알아차린다. 그들에게 어떤 학교가 다른 학교보다 좋다는 힌트를 주면, 그들은 더 좋은 학교에 들어가려고 줄을 설 것이다. 중산층은 다른 집단보다 선택을 위한 항해를 더 잘할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이며 올바른 일이다. 어떤 학교가 더 좋다고 공식적으로 딱지가 붙기만 하면 나머지 학교들은 더 나빠질 것이다. 중산층 학생들이 모여드는 곳에서 몇몇 ‘선택받은’ 학교들은 금방 자기 충족적으로 성공하는 학교가 된다. - 마크 올슨 외(2015),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계보와 그 너머: 세계화 ‧ 시민성 ‧ 민주주의>, 학이시습, 314쪽.    


선택에는 자율 개념이 뒤따른다. 영국 서리대학교 마크 올슨 교수는 학교 선택의 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전자유주의자의 ‘자율적인 인간’에 가 닿을 수 있다고 보았다. 개인의 필요나 이익 또는 요구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교육 프로그램 가운데 대안을 숙고하고 결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주체로서 말이다. 이른바 ‘자율적 선택’이 만들어지는 논리다.


마크 올슨에 따르면 선택 관념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소비자들의 교육적 선택의 질이 전문 지식을 갖춘 공급자가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교육의 질보다 우수하다. 소비자들은 어떤 교육적 선택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공급자보다 더 잘 안다. 이러한 선택 모델에서 교육자의 지식은 두 번째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선택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희소한 자원을 배분 ‧ 활용하는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간주된다. 그러한 담론의 밑바탕에는 시장 기제의 작동에 국가 개입을 복속시키는 사고가 깔려 있다. 국가의 책임과 책무보다 개인 선택 극대화가 우선시된다. 사회적 시민성이나 복지 권리보다 재산권이 전면에 나선다. 선택을 촉진하는 일은 선택 이론에 포함된 소비자 주권과 시장 자유라는 두 가지 이상을 반영한다.


미국의 자유시장 이론가인 첩(Chubb)과 모(Moe)는 선택이 가져오는 효과성에 관한 공리주의적 주장을 폈다. 그들은 선택이 높은 수준의 학생 성취, 더 바람직한 형태의 학교 조직, 더 적은 관료 규제, 더 좋은 학교 경영자 리더십 구조, 많은 변인(명확한 목표, 더 높은 교사 전문성, 더 넓은 범위의 학문 프로그램 등)과 관련된 더 높은 수준의 질을 촉진한다고 주장했다.(마크 올슨 외, 위의 책, 318쪽 참조)


시선을 돌려 우리 현실을 잠깐 둘러보자. 선택 담론이 극에 달했던 때는 이명박 정권 시절이었다. 당시 정부의 교육 정책을 총괄한 이주호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국회의원 시절에 집필한 <평준화를 넘어 다양화로>라는 책은 다음과 같은 핵심 주장으로 요약된다.


“평준화 체제가 학교를 관료주의화시켰다. 평준화를 위해 정부가 재정 지원을 하는 만큼 학교를 통제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학교의 관료주의 경향이 강해졌다.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서 자율형 사립고와 같은 수요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학교가 필요하다.” - 서용선 외(2013), <혁신교육 미래를 말하다>, 맘에드림, 158쪽에서 재인용함.


자율형 사립고 같은 수요자 선택 시스템에 터 잡은 학교 체제로의 변화는 위에 적은 고교 다양화 프로젝트로 구체화했다. 결과는 ‘재앙’ 수준이었다. 특목고의 출현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돼 오던 평준화 시스템을 거의 해체 수준에 이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고교 서열화’ 판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출처: 서용선 외(2013), <교육개혁 미래를 말하다>, 162쪽.]    


4    


선택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먼저 구조적인 것. 그것은 선택의 전제와 결과로 상정되는 다양성과 효율성과 자유로움 들이 주는 ‘아름다운’ 이미지와 크게 대비된다. 마크 올슨의 날카로운 지적을 들어 보았으면 좋겠다.    

선택론자들은 현실 정책과 사회적 맥락에서 부과되는 선택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고려를 간과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부유하지 않은 가정의 선택 범위는 좁다. 가난한 사람들은 학교의 질과 관계없이 가까운 학교에 가야만 한다. 소문난 매우 부유한 사람들은 ‘과다 선택’되기 십상이어서, 학생이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고객’을 효과적으로 선택하는 일이 현실이 된다. 일반적 형평 쟁점은 간과되는 경향이 있어서 선택을 강조하면 부자 학교와 가난한 학교 그리고 부자 공동체와 가난한 공동체 간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뒤이어 사회적 분열이 증대될 것이다. - 마크 올슨 외, 위의 책, 319쪽.    


선택은 집단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제로섬 게임 같은 것이다. 마크 올슨은 선택을 중시하는 시장주의가 득세하는 사회에서 학교 선택권을 부여받은 학부모 개개인은 그 기회를 잡음으로써 합리적으로 선택하지만 비슷한 조건 아래 있는 또 다른 학부모들이 유사한 선택을 하게 되면 개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대안이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번에는 ‘선택의 합리성’ 문제를 보자. ‘수월성’ 운동의 선봉장이었던,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교육자문관 체스터 핀(Chester Finn)은 학부모 선택이 책무성을 직접 묻는 형식이라면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나쁜 학교를 탈출해 좋은 학교로 향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교육 선택이 학교 간 경쟁을 강화해 학교를 다양성과 개별성으로 유도할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여기에는 선택을 허용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좋은’ 학교와 ‘나쁜’ 학교 간에 선택을 해야 할 때, 합리적 학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자녀를 위해 ‘좋은’ 학교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나쁘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집단의 학교들과 구분될 수 있을 때에만 소위 ‘좋은’ 학교를 알아차릴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학부모가 ‘좋은’ 학교와 ‘나쁜’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동등한 사회적 위치에 있을 수는 없다. - 마크 올슨 외, 위의 책, 321쪽.


영국 교육학자 루스 조너선(Ruth Jonathan)은 교육을 본질적으로 ‘지위적 사회재(positional social good)’로 보았다. 교육을 받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지각하는 가치와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이 지각하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사회 경쟁에서 상당히 다른 출발점에 있는 개인이나 집단 간에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국가가 한 걸음 물러날 때, 많이 알고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최선의 구매’에 영향을 끼치고 얻어 낼 수 있는 부모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어 내고자 하는 소용돌이 안으로 휘말려 들 것”이라고 말했다.


선택은 교육 ‘소비자’의 재량권을 증가시킨다. 교육에서의 선택 담론은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 합리적인 소비자들이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는 논리와 맞물려 반박하기 힘든 ‘도그마’처럼 군림한다. 마크 올슨의 지적처럼, 조바심 이는 부모들이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선택하는 것이므로 도덕적 ‧ 윤리적 정당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묻고 싶다. 부모들이 내리는 그 선택이 진정으로 자녀에게 ‘이익’이 되는가. 조너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부모 한 사람 한 사람은 자녀들이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늘릴 수 있을지라도 학부모라는 범주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격화된 경쟁 풍토에서 자라도록 하고, 아이들의 복리를 더 심화된 위험 속에 빠뜨릴 수도 있다.” - 마크 올슨 외, 위의 책, 323쪽에서 재인용함.


미국 생물학자 가렛 하딘(Garett Hardin)이 주창한 ‘공유지의 비극’ 사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개인과 공공의 이익이 서로 맞지 않을 때 개인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면 나머지 모두가 파국을 맞는 재앙에 이른다. 공동체는 붕괴한다.


조너선은 시장의 힘을 빌려 교육 체제를 변화시키는 일을,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면서 사람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기 위해 ‘국가는 뒤로 물러나는’ 중립적 과정으로 볼 수만은 없다고 주장했다. 사회‧문화‧정치적 효과를 지니는 일을 개인의 결정에 맡겨 버림으로써 입법가는 자신들이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정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방향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킨다고 지적했다.


시장은 결코 자유롭게 형성되거나 작동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노엄 촘스키와 더불어 ‘행동하는 지식인’의 대표로 평가받는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관료제 유토피아>에서 적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시장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거나 자치적인 자유로운 영역으로 출현한 게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 즉 정부의 활동, 특히 군사적인 활동에서 비롯된 부작용의 결과였거나 정부 정책에 의해 직접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동전은 군인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져 널리 퍼졌다. 비인격적인 냉정한 시장은 군 부대의 이동, 도시 약탈, 공물 탈취, 전리품 처리를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현대적인 중앙은행 제도조차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선택 담론은 교육을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본다. 시장은 자유롭다.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은 최선의, 최대의 이익을 가져온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대신 국가는 뒤로 물러난다. 실제로 그러한가. 우리가 살핀 연구들은 ‘아니오’라는 답을 내놓았다. 선택 담론은 ‘신화’다.


* 본문에서 서지와 쪽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연구 사례들은 모두 마크 올슨 외(2015),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계보와 그 너머>에서 가져왔다. 제목 커버 배경 사진은 존 듀이다. 인터넷 <다음> 백괴사전에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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