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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an 30. 2019

“글이야 배우면 되지”

영화 <말모이>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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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저녁 가족들과 함께 영화 <말모이>(감독 엄유나)를 보았다. 근대 국어학의 태두 주시경 선생 때부터 준비되기 시작한 최초의 우리말 사전 <조선말 큰사전>이 만들어지기까지 과정과 일제 말기 벌어진 조선어학회 사건 들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극화한 작품이었다.


나는 개봉 즈음 <말모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 화려한 시절에 ‘조선어학회’니 ‘사전’이니 하는 고색창연하고 고리타분한 소재들에 누가 관심을 가질까. 차라리 정색하고 만든 다큐멘터리가 더 관심을 끌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개봉 뒤 주변에서 들려 오는 평들이 제법 뜨거웠다.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기대가 컸다. <극한 직업>을 고집하는 큰딸과 둘째 녀석을 간신히 어르고 달래 영화관으로 향했다. 국어 선생 체면을 그렇게라도 살리고 싶었다.


아쉽게도 내 눈에 <말모이>는 범작으로 보였다. 약간 작위적으로 보이는 이야기 흐름이나 과장적인 연기들이 극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했다. 주위 평을 듣고 지레 수준을 높게 잡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기름기를 제거한 담백한 화면 구성과 곁길로 빠지지 않고 극의 절정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우직한 전개 방식은 좋았다. ‘말모이’(사전)를 만들기 위해 십 년 세월을 묵묵히 걸어 온 인물들의 삶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9살 막내딸의 눈에서 눈물을 훔쳐 냈으니 그럭저럭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2

     

나는 <말모이>를 보면서 4년 전 본 일본 영화 <행복한 사전>(감독 이시이 유야)이 떠올랐다. 2014년 3월 7일 일본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다 8개 부문을 수상한 이 영화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장장 15년에 걸쳐 “대도해(大渡海)”라는 이름의 사전 만드는 사람들을 극화한 작품이었다. “대도해”를 만들기 위해 15년 동안 묵묵하게 말을 모으는 편집부원들의 모습이, 우리말 사전 편찬을 위해 목숨을 내건 “말모이” 편집자들과 겹쳐 보였다.


사전 이름에 “바다를 건넌다”라는 뜻의 ‘도해(渡海)’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행복한 사전> 연출자는 사전 편찬 일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편집주간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들려 준다.


“단어의 바다는 끝없이 넓지요. 그 넓은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 인간은 사전이라는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해 줄 말을 찾습니다. 유일한 단어를 발견하는 기적과, 누군가와 연결되는 기적을 바라며, 광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전, 그것이 바로 ‘대도해’입니다.”

   

우리는 사전에 실린 단어들과, 이들 단어 각각에 대한 뜻풀이를 보면서 인간의 마음, 정신, 세계관, 역사, 현실과 상상의 세계 들을 그린다. 그리고 좋은 사전에는 쉽고 간편하고 좋은 뜻풀이가 담겨 있다.


영화 <말모이>에서는 ‘엉덩이’와 ‘궁둥이’를 구별하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들 단어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현재 우리말의 ‘공식 표준 사전’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뜻풀이를 찾아 보시기 바란다. ‘엉덩이’와 ‘궁둥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다 보면 ‘볼기’라는 말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맞다. ‘볼기짝’의 그 ‘볼기’다!

  

“북쪽을 향하였을 때의 동쪽과 같은 쪽”. “숫자 10에서 0이 있는 쪽”. 명사 ‘오른쪽’을 <표준국어대사전>과 <대도해>에서 각각 풀이해 놓은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 뜻풀이가 좋다고 생각하는가.     


3     


<말모이>는 십유여 년 전 정성스레 정리한 단어 공책도 떠올리게 했다. 그즈음 나는 종이로 된 국어 사전을 일일이 한 장씩 넘겨 가면서 희귀한(?) 단어를 찾아 까만 가죽 표지로 장정한 두툼한 단어 공책에 적어 넣는 취미(?) 활동에 빠져 있었다. 글 속에 나오는 말들이 여러 색깔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무엇보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아 사라진 순우리말이나 토착 방언, 고풍스러운 한자어 들이 가져 오는 각별한 정감이 좋았다.


‘봉죽(을) 들다’. “남 일을 거들어 도와 주다”라는 말이다. ‘부라질’. “젖먹이의 두 겨드랑이를 껴서 붙잡고 좌우로 흔들며 두 다리를 번갈아서 오르내리게 하는 짓”을 일컫는 우리말이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서 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사전에서 찾아 낸 이 특별한 말들은, 2006년 3월 15일 자로 된 단어 공책 마지막 쪽에  적어 놓은 12개의 단어들 중 일부다. 나는 지금도 종종 이 공책을 펴 놓고 “광대한 단어의 바다”를 건너곤 한다.     


4


<말모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조(갑윤) 선생’(김홍파 분)이, 까막눈 ‘판수’(유해진 분)를 조선어학회 잔심부름꾼으로 들이는 것에 못마땅해 하는 ‘류정환’(윤계상 분)에게 한 마디 말을 던지는 장면이었다.


“글이야 배우면 되지.”     


조 선생의 말은 ‘사람’을 먼저 보라는 뜻이었다. 류정환은 조 선생의 말을 듣고 판수에 대한 굳은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이후 판수와 특별한 유대 관계를 맺는다. 나는 <말모이>에서 볼 만한 ‘감동 라인’ 중 하나로 류정환이 판수를 인간적으로 신뢰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들고 싶다.


“글이야 배우면 되지”가 인상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교육자’들에게 필요한 어떤 불변의 원칙 같은 것이 전광석화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포함한 많은 교사가 학생 하나하나를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무언가를 배워 가야 하는 ‘학생’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학생은 교사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만 있어야 하고, 무조건 교사의 말을 받아들여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처럼 간주된다.

 

그러나 언필칭 “글이야 배우면” 되고, “공부야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전에 교사와 학생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걸맞은 관계를 맺고 그것을 유지해 가는 일이 아닐까. 진짜 공부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오가는 인간적인 신뢰감과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보이지 않는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 제목 커버의 사진은 내가 정리한 단어 공책의 마지막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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