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문장학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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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짓기든 쓰기든 문장을 만들어 내는 일을 힘겨워하는 교사들이 하소연할 데는 별로 없다. 적지 않은 교사들이 학년부장이나 업무 담당자가 보내 준 견본 문장들을 바탕으로 그것을 응용해 학생부 쓰기를 진행하는 게 지금 우리나라 학교 현실이다. 나는 그런 일이 문장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일, 곧 글짓기의 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교사들이 깊은 사유와 성찰을 바탕으로 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인공적인 글짓기에 빠져드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교사들은 본격적인 의미의 글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교사들은 글 읽는 맛을 어느 정도 느끼게 하는 일정한 분량과 형식의 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나는 교사들의 쓰기 환경을 그렇게 만든 주요 요인이 공공 기관 특유의 개조식(個條式) 문장 작법에 있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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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공문서 양식이나 교육(지원)청 보고서를 채우는 문장의 상당수는 이른바 개조식이다. 개조식 문장은 골자 중심으로 과도하게 축약되거나 요약된 형식을 따른다. 그래서 개조식 쓰기에서는 내용에 따른 질적 층위별로 일련 번호나 기호들을 사용하며, 주요 내용을 포괄하는 요점을 중심으로 명사형 단어들이 나열되는 구성 방식을 취한다.
개조(個條)는 낱낱의 조목을 세는 단위를 뜻한다. 따라서 개조식에 따라 글이나 문서를 작성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활용하는 수식 표현이나 사족을 달게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거꾸로 말하면 쓰기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주요 정보나 사실 중심으로 내용이 간결하고 일목요연하게 전달됨으로써 독자의 가독성을 높이고 독자로 하여금 내용을 더 신속하게 이해하게 하는 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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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측면에서 보면 개조식은 쓰기를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글쓰기 경험을 제공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와 같은 개조식 글쓰기가 교사가 글쓰기 감각을 익히는 데 심대한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개조식 문체에 숨어 있는 ‘비인간화 현상’ 때문이다.
보통 문장은 ‘사람 냄새’를 품고 있다. 하나의 문장에서 사람 냄새를 보여 주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이/가’나 ‘-을/를’ 같은 조사류는 건조한 문법적 관계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너는 가지 않지만) 나는 간다.”와 같은 문장에서 화자 ‘나’가 특정되면서 그 ‘나’가 어딘가를 가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담화 맥락에 따른 것일 수 있지만 조사 ‘-는’이 갖는 특별한 의미 기능에 말미암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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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인간학’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요소로 다양한 형태의 문장 종결 표현들이 있다. 우리말은 서술어로 쓰이는 동사나 형용사의 어간(語幹, 말줄기)에 다양한 형태의 선어말어미나 어말어미를 붙여 화자의 심리 상태나 태도, 발화 의도 등을 표현하면서 문장 종결을 다채롭게 하는 특징이 있다. 일반언어학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언어를 교착어라고 부르는데, 우리말의 다양한 종결 표현들은 이러한 교착어적인 특성을 잘 드러낸다.
개조식 문장들에서는 문장 종결 표현의 다양성을 이끄는 문법 요소들이 제한적으로 쓰이는 경향을 나타난다. “담임이나 상담교사의 가해학생 수시 상담” 같은 문장을 보라. 이 전형적인 개조식 문장에는 행위의 주체와 대상와 조건만 나와 있을 뿐 화자(글쓴이)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의식, 관점을 보여주는 요소들을 찾아볼 수 없다.
개조식 문장들은 위 예에서처럼 한자어를 중심으로 한 명사류 단어들이 죽 나열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또 다른 개조문 유형으로 동사나 형용사 서술어의 명사형으로 문장이 휘갑되는 형식이 있다. “담임이나 상담교사가 가해학생을 수시로 상담함” 같은 문장이다. 이런 문장이 주는 어감을, “담임이나 상담교사가 가해학생을 수시로 상담한다” 같은 일반적인 서술문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