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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pr 14. 2019

학교 글쓰기의 주적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3)

1


‘상담함’과 ‘상담한다’는 단순히 문장 종결 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 이상의 특별한 차이를 갖는다. 


‘상담한다’에서는 선어말어미 ‘-ㄴ’과 어말어미 ‘-다’를 통해 문장의 명제 내용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주관성의 측면이 드러난다. 곧 ‘상담한다’의 화자는 현재시제의 ‘-ㄴ’을 통해 시간성에 따른 발화 효과(현재성, 장면의 구체성과 생생함)를 의도하고 있으며, 종결어미 ‘-다’를 통해 화자에 대하여 대답을 요구하거나(의문문) 행동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는(청유문, 명령문) 것 없이 명제 자체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려는 심리적 태도를 보인다.


반면 우리는 ‘상담함’에서 화자의 주관적 측면이나 내면의 심리적 태도를 감지하기 어렵다. 현재시제를 나타내는 문법 요소인 선어말어미 ‘-ㄴ’이 사라지면서 ‘상담함’은 초시간성(무시간성?)의 영역에 자리 잡게 된다. 명사형어미 ‘ㅁ’은 동사 서술어 ‘상담하다’에 내포된 동작성이나 시간성 등 동태적인 요소를 소거해 버림으로써 상담하는 일을 정태적이거나 절대적인 영역에 머무르게 한다. 


시간, 움직임, 동작은 인간의 것들이다. 문장 인간학의 관점에서 볼 때 초시간성이나 정태성의 특징을 보이는 개조문 방식은 일체의 인간적인 요소를 말끔하게 없앰으로써 문장의 명제 내용이 절대적인 신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처럼 각인시키는 효과를 낸다.


2


이를 좀 더 극단으로 밀고 가면서 말하면, 나는 개조문이 사람의 문장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개조문은 탈인간, 초인간, 비인간 세계의 문장이며, 나와 당신은 어쩌면 그것이 절대자나 신의 세계에서나 쓰일 법한 아주 신성한 문장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개조문에서 문장의 명제 내용은 시간을 초월하여 마침내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지위를 갖게 되는 경지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는 지나친 주장이 아니다. 한국 관공서에서 희유하게 쓰이는 개조식 문체의 역사적인 기원은 일본 메이지 시대 <대일본제국 헌법>을 비롯하여 “권위가 요구되는” 법령의 문장이나 교과서 등에 사용된 문어(文語)였다.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함(천황ハ 陸海軍ヲ 統帥ス)”(<대일본제국 헌법> 제11조)과 같은 문장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문장을 통하여 의도한 것은 문장 자체에 권위와 위엄을 부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문장을 명사형의 ‘-ㅁ/음’, ‘-임’으로 마무리하는 개조문 방식이 일제 강점기를 전후로 우리나라에 이식된 일제 문체의 잔재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소준섭, <보고서 속 ‘-함’, ‘-음’, ‘-임’...대체 왜 쓰는 걸까?>, , ≪오마이뉴스≫, 2019.2.20.)


3


문장이 권위를 갖는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태초 역사에서 문자가 신의 선물이었으며, 문장이 오랫동안 사람과 신을 매개하는 신성한 도구였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 글은 사람이 쓰면서도 신의 계시를 보여 주는 메신저처럼 간주되었다. 그러다 인류의 문자관이나 문장관은 좀 더 인간친화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신적인 위엄을 갖추고 있지 못하더라도 나름의 절대적인 권위가 있어야 하는 문장들이 여전히 있을 수 있다. 한 사회나 국가는 사람들 사이의 온갖 관계를 규정하면서 공적 쓰임새를 갖는 문서들이나 국가 간 약속을 명시해 놓은 글들에 자연스럽게 권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우리가 더 절실하게 바라는 문장은 민주적인 문장이라고 본다. 그것은 절대자의 묵직한 권위보다 평범한 사람의 소박한 인간미를 더 진하게 풍길 것이다.


4


그렇다. 문장들은 그 안에 쓰인 단어의 종류와 성격, 문장 종결 방식 여하에 따라 다양한 색깔과 냄새를 갖는다. 나는 무미건조한 공문서의 개조식 문체에서 학생들과 교사들의 숨소리를 느끼지 못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면 마땅히 존재할 환호의 경쾌와 침울의 불쾌를 공문서체 특유의 개조식 문장은 담아내지 못한다. 


개조식 문장은 사실을 관념화, 추상화하고 학생과 교사들의 생생한 감각과 생각을 사라지게 만든다. 오늘날 학교 글쓰기의 주적들이 있다면 나는 그 첫 자리에 반드시 개조식 문장 작법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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