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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pr 16. 2019

교사들은 원고지가 많다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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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글쓰기의 주적들이 늘어선 진영의 앞자리에 개조식 문장을 넣는 것이 못마땅한 분들이 계실 것이다. 고작 개조식 문장 따위가 교사들이 글을 쓰는 것을 방해한다고? 개조식 문장 말고도 글을 쓰지 않아도 되거나 글을 쓸 수 없게 하는 이유가 얼마나 많은데?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 아니 내 머릿속에 있는 학교 글쓰기의 주적 목록을 끝없이 정리해 보여 줄 수 있다. 교사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10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면 교사가 글을 쓰지 않아도 되거나 글을 쓸 수 없게 만드는 환경 조건은 100가지가 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교사들이 글쓰기를 하지 않아도 되거나 할 수 없는 수백 가지 이유를 정리하며 골머리를 앓기보다 교사들이 글을 써야 하고 쓸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실들에 골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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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글과 문자의 성소이자 제국이다. 학교는 여느 공공 기관 중에서도 글과 문자를 가장 많이 자주 생산하고 소비하는 공간이다. 학생과 교사가 수업을 하는 교실에서 펼쳐지는 유서 깊고 전형적인 광경을 떠올려 보라. 학생과 교사는 교과서를 펼쳐 거기에 담긴 문장이나 글을 함께 읽는다. 교사가 칠판에 문장들을 쓰면 학생들은 거기에 적힌 문장들을 공책에 그대로 옮겨 적는다.


교사들은 학교생활기록부, 정기고사용 문제지, 수행평가용 활동지, 학습지, 공책 등에 일련의 문장들을 써 넣으면서 학생들을 평가한다. 학교 교육 활동에 뒤따르는 공문서나 보고서는 최소 수개에서 최대 몇 쪽에 이르는 문장이나 글로 이루어진다. 교사들이 글쓰기에 활용하는 원고지 서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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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사 글쓰기의 백미를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근대적인 학생부의 역사는 18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 페스탈로치 연구자의 권위자인 김정환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는 페스탈로치가 초기 교육 운동을 펼친 빈민노동학원(1774~1780) 시절 작성한 <빈민노동학원기록>에 실린 학생 기록이 교육사에서 출현한 “최초의 조직적인 생활기록부”라고 평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루디 베크리. 우수하다. 기도에 경건하다. 아주 부지런하다. 이해가 빠르다. 산수에 뛰어난 재질이 있다. / 발바라 브르너. 취리히 출신. 17세. 3년 전 극도로 무지한 상태로 입원(入園). 그러나 재능이 뛰어남. 실을 잘 짜고, 일기 쓰기도 잘 함. 노래에 천분이 있음. 이 아이는 요리를 주로 맡음. - 김정환(2008), 《페스탈로치의 생애와 사상》(개정판), 박영사, 40쪽.


18세기 후반 페스탈로치가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평가한 결과를 최초로 쓰기 시작한 이래 학생부 쓰기는 교사가 자신의 교육 활동을 결산하고 성찰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예를 들어 교사들이 학생부 종합의견란에 써 넣는 학생 평가 내용은 그 자체로 학교 교육의 가능성과 한계를 방증하는 훌륭한 자료이다.


그러므로 학생부에 새겨지는 문장 하나하나는 학생이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과 신뢰, 교육(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인간 변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솔직한 토로가 담겨 있어야 한다. 교사들은 이에 합당하게 글을 쓰고 있을까. 내 경험을 바탕으로 고백하자면 ‘아니오’에 가깝다.


학생부를 작성하는 나는 자주 사려 깊은 인간 교육자가 아니라 공문 서식에 행정 용어를 기계적으로 채워 넣는 냉혹한 행정가처럼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내 손가락들은 학교 교육의 가능성과 교육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학생) 존재의 변화가 가져 온 놀라운 결과를 묘사하는 단어들을 만들기 위해 자음자와 모음자 키 사이를 바쁘게 오고간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들어 낸 시간의 뒤끝은 종종 허탈한 심정으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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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에게는 문제지라는 아주 특별한 원고지가 있다. 시험은 교육 활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게 해 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학교에서는 시험을 통해 학생과 교사가 학교 교육의 목표를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확인한다. 그런 점에서 시험을 치르는 시간은 깊은 성찰의 시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사들은 문제지에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일을 한 학기의 중간이나 끝을 고통스럽게 매조지는 통과의례처럼 간주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체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문제들을 통해 유대인을 혐오하고 독일 중심의 국가 민족주의 이념을 퍼뜨리는 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문제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미국 언론인 밀턴 마이어(1908~1986)가 쓴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다.


나치 치하의 독일 교육부는 대개 ‘순수 학문’ 분야라고 생각하는 수학 교과에서 친군사적인 소재나 나치와 관련된 건물들을 활용하여 군국주의 이념을 설파하였다. 이자율을 구하는 데 고리대금업자 같은 유대인을 등장시켜 반유대주의 정서를 조장하고, 인구 비율에 대한 문제에서 독일 민족과 그에 인접한 국가들의 민족을 대비하여 배타적인 민족 감정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거의 모든 문제가 탄도학이나 군사 배치에서 나온 것이거나, 또는 예를 들어 나치의 기념관이나 기념물 같은 건축물에서 나온 것이었죠. 이자율에 관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유대인 한 명이 500마르크를 12퍼센트 이자율로 빌려 줄 경우...’ 그리고 인구율에 관한 문제도 있었죠. 유럽의 ‘튜턴’, ‘로마’, ‘슬라브’ 민족에 관한 인구 그래프를 작성하라는 문제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묻는 거죠. ‘1960년에 이들 민족의 상대적 크기는 얼마가 되겠는가? 거기서 튜턴 민족에게 어떤 위험이 감지되는가? - 밀턴 마이어 지음, 박중서 옮김(2014),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갈라파고스, 280~281쪽.


우리는 이런 사례들을 반면교사처럼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나는 교사가 정기고사용 문제지를 채우는 문항들을 만들면서 민주적인 문장들을 고민해야 하며, 충분히 그런 문장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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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마다 학생들과 함께 ‘날적이’ 쓰기 활동을 한다. 앞선 학생이 쓴 글에서 눈길을 끄는 단어나 구절을 고른 뒤 그것을 제목이나 주제로 삼아 릴레이로 글을 써 나가는 방식이다. 나는 학생들이 매일 번갈아 가며 날적이 공책에 글을 쓰면 글 끝에 답글을 길게 적어 넣는다. 거기에는 글을 읽은 소감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담긴다. 나는 학생들에게 날적이 글과 답글을 글로 나누는 대화장이라고 생각하라며 적극 활용하라고 권한다.


나는 날적이 공책의 빈칸이 나만의 특별한 원고지처럼 다가온다. 그 여백의 공간에 답글을 남기는 일을 교사로서 누리는 특권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특권이 내게만 허락된 것은 아니다. 교사들에게는 그 위에 글을 써 넣어야 하는 다양한 형태의 또 다른 원고지들이 있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이나 교육 활동 중에 활용하는 수행평가용 활동지나 학습지나 공책들이다. 교사들은 그 위에 매일같이 길거나 짧은 문장들을 써 넣는다.


나는 이들 특별한 원고지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장 쓰기가 교사가 학생과 글로 나누는 대화라고 이해한다. 그러니 교사가 ‘검’이나 ‘확인’이라는 글자만으로 채워 가는 활동지나 학습지는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나는 공책에 해 놓은 숙제를 선생님이 확인하거나 검사하면서 끝 부분에 써 놓은 ‘애 많이 썼다’나 ‘숙제하느라 고생 많았다’ 같은 문구가 학생들의 심성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다. 나는 교사가 글을 써야 하고, 더 많이 써야 하며, 더 잘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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