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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Oct 10. 2019

엄마

1


지난주 금요일 2교시 끝 무렵 막내누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엄마 숨소리가 이상하다고 했다. 교장님에게 사정을 말하고 부랴부랴 막내누나 집으로 향했다. 엄마 숨소리가 조금 거칠긴 했으나 그 며칠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숨을 돌리고 누나들과 함께 조용히 점심밥을 먹었다.


상을 치운 뒤, 셋째누나가 엄마 손을 잡고 곁에 누웠다. 누나는 엄마 손을 주무르며 조용히 말을 걸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엄마는 숨을 고르게 쉬고 계셨다. 십여 분쯤 지났을까. 셋째누나가 몸을 일으키면서 막내누나에게 엄마 곁에 누워 눈을 좀 붙이라고 했다.


나는 엄마가 누워 계신 침대 바로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막내누나가 엄마 곁으로 가더니 나를 불렀다. “은균아, 엄마가 숨을 이상하게 쉬어. 봐 봐.” 나는 커피잔을 내려 놓고 엄마 쪽으로 몸을 얼른 돌렸다. 엄마는 배가 크게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쉬고 있었다. 3초나 4초쯤 될까. 숨과 숨 사이 간격도 이상하다 싶게 길었다.


나는 직감했다. ‘엄마가 마지막 숨 몇 개를 토해내고 계시구나.’ 나는 “엄마, 엄마” 하고 연달아 부르며 “숨 좀 잘 쉬어 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몇 초 뒤 크고 깊은 숨을 두 번 내쉰 엄마의 조그만 배는 미동 하나 없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나는 엄마 얼굴을 쓰다듬으며 오열했다.


2


2011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내내 막내누나 집에서 지내셨다. 아버지의 부재가 가져 온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한동안 시름시름 앓으셨다. 진지를 제대로 잡수지 못했고, 거동하는 걸 힘들어 하셨다. 그때 나는 엄마가 오래 살지 못하실 것 같았다.


엄마는 아버지와 한동네에서 나고 자라 결혼을 하셔서 ‘한동떡(한동댁)’이라는 택호로 불렸다. 엄마와 아버지는 자주 투닥거리셨으면서도 서로를 생각하고 챙기는 애정이 각별했다. 장날 두 분이 나란히 고샅을 나선 것을 본 적이 없지만 각자 장을 보고 오신 두 분 손에는 남편과 아내가 좋아하는 조그만 먹을거리들이 들려 있곤 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9남매(그중 둘을 각각 5살, 7살에 병으로 잃으셨다.)를 낳아 길러 내신 힘이 이런 데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가 옆자리에 계시지 않은 것이 엄마에게 큰 고통이었으리라. 그러나 천만 다행이게도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의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셨다. 나는 그것이 식사, 목욕, 대화, 나들이 등등을 꼼꼼히 챙긴 막내누나와 매형의 정성 덕분이었으리라 믿는다.


3


지난 몇 주 사이 엄마는 당신의 죽음을 조용히 준비하셨던 것 같다. 추석 직전이었다. 막내 매형이 엄마에게 ‘특별 제안’을 했다. 거동하기 힘들어진 뒤 자주 못 간 고향 동네에 다녀오자고 한 것이다. 그 전부터 엄마가 시골집에 다녀오자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매형 말에 두 말 없이 따르셨다.


엄마는 귀한 사위 먹여야 한다며, 시골에 가면 밥을 먹곤 하던 참게매운탕 집에도 들르셨다고 한다. 그것은 여느 다른 때에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3주 전쯤, 막내누나의 급한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만 해도 엄마는 나를 또렷이 알아보셨다. 눈빛이 조금 흐릿했지만, “제가 누구예요?” 하고 묻자 내게 동자의 초점을 맞추고 “우리 은균이.”라고 또박또박 대답하셨다.


2주 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갔을 때는 큰딸부터 막내까지 세 아이 이름을 모두 부르면서 쳐다보셨다. 엄마는 총기가 좋아 평소 어린 시절 기억을 되살려 막내누나에게 들려주곤 하셨다. 그 맑은 힘을 마지막 순간까지 잃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감사하다.


4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방학이었지만, 보충학습을 한다고 내내 자취방과 학교를 오가고 있었다. 학기 중일 때와 다름없이 하루종일 수업을 하고 나서 저녁 10시까지 야간학습이 이어지는 강행군의 나날이 이어졌다. 더구나 나는 조그만 슬래브 집 2층에만 자취방이 5개나 있는 집에서 공동 수도와 공동 화장실을 쓰며 사는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날도 나는 골마지 낀 열무김치에 굳은 밥술을 뜰 생각에 온몸이 느른했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자취방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을 터덜거리며 올랐다. 그런데 자취방 앞에 엄마가 앉아 계셨다. 방에는 내가 좋아하는 고막 무침과, 방앗잎과 매운 고추를 함께 넣어 부친 부추전과, 채 썬 어린 호박을 밀가루에 버무려 기름에 지진 호박전이 조그맣고 둥근 양은 밥상 위에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구례 쪽에 가까운 시골 집에서 자취방이 있는 순천까지는 백여 리 길이 넘었다. 그 먼 길을, 반찬거리를 이고 들고 오셨을 엄마 모습이 떠올라 나는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엄마가 갓 지어 고봉으로 담아 준,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다.


5


엄마의 손과 얼굴은 아흔 해 생의 마지막 숨을 뱉어 내신 직후에도 내내 부드럽고 따뜻했다. 나는 검버섯 하나 없는 엄마의 깨끗한 얼굴이 평소 엄마가 살아 온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도 그랬지만, 엄마는 우리 자식들 앞에서 회초리 한 번 드신 적이 없었다. 큰소리로 나무라시거나, 상스러운 말을 써 가며 혼을 내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엄마는 우리에게 심부름이나 집안일을 시키실 때, 따뜻하고 부드럽게 권유하셨지 억센 말투로 명령하거나 지시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나는 그런 엄마가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 강한 힘으로 우리를 이끄셨다고 믿는다.


6


나는 하관 예배에서 부른 찬송가 338쪽의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목이 메어 우느라 함께 부르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평소 엄마가 가장 좋아하여 즐겨 부른 찬송가였다. 슬프고 속이 상하는 일이 있을 때 엄마는 부엌 아궁이 앞이나 마루 끝이나 밭둑가에 주주물러 앉아 이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때 엄마의 목소리와 눈물이 떠올라 가슴이 메인다.


나는 힘들고 아픈 일이 생기거나, 막막함에 무엇을 어찌할 줄 모를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이라는 찬송을 즐겨 부르고 듣는다. 예수가 산상에서 설파한 여덟 가지 복을 바탕으로 한 이 찬양에서 나는 두 번째에 있는 애통하는 자의 복에 관한 대목이 가장 좋다. “애통하는 자는 복 있네. 위로를 받을 것이요.”

그러나 나는 애통하는 자에게 오는 위로가 복임을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내 주를 가까이 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셨으리라 믿기에 영원한 하늘나라에 무사히 잘 도착하셨으리라 생각하며 기쁜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고 있다. 엄마가 평생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을 이 세상에 베풀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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