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가 돌아가신 지 38일이 지났다. 나는 그럭저럭 살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못할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날도 며칠 있었지만, 나는 곧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커가는 아이들 생각을 하면서 ‘어서 힘을 내야지’ 다짐하곤 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내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변하지 않은 것일까. 한 사람이 곁에 있다가 떠나는 일은 떠났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남아 있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는 중대한 사건이다. 그의 삶은 누군가 떠나가기 전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그가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결은 지난날의 그것과 분명 다르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면, 몇 주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해 하다가도 ‘다음 주면 뵈러 가야겠다’ 다짐하며 문득 마음을 다잡곤 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러자 나는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커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다가도 맥이 빠진다. 힘을 내더라도 지난날 엄마가 계실 때만큼의 힘을 내지는 못한다. 그게 사람의 힘이다.
2
9년 전 연구년을 보내기 위해 학교를 떠났다가 한 학기만에 돌아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2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는데, 연구년이 (새 학년이 아니라) 2학기 초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걱정이 컸다. 우리 반 아이들이 새 임시 담임에게 적응하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우리 반 아이들은 잘 지냈다. 이런저런 경로로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내가 없을 때보다 오히려 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내 걱정이 쓸 데 없는 기우에 불과했다는 생각에 까닭 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한 학기를 떠나 있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수업을 하고, 새 담임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보낸 하루하루가 그 전과 같았을까. 내가 없는 교실이 지난날의 교실과 달라 조금 낯선 시간을 보낸 아이가 한둘은 있지 않았을까.
학교는 그곳을 채우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무관하게 그럭저럭 잘 굴러간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들이 있었던 지난날의 학교와 또 다른 누군가들이 있는 지금의 학교가 같으면서도 분명 다르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겠는가. 누군가들이 교실 안팎에서 내뿜는 기운과, 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분위기는 또 다른 누군가들의 그것과 다르다. 학교는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며, 사람은 여하한 서로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톨게이트 수납원 노동자들의 파업 국면에서 여러 이야기들을 접했다. 그중 내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한 것은 어느 기사에 달린 댓글에서 우연히 본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돈 주고받는 단순한 일을 하면서 정규직을 요구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생각해 보자. 단순한 일과 복잡한 일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법전과 기존 판례에 따라 판결문을 완성하는 판사와, 시시각각 변하는 교통 상황을 체크하면서 도로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이 담당하는 업무의 단순도와 복잡도를 우리가 완벽하게 계산해 낼 수 있을까. 단순한 일을 하면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언제든 다른 사람이나 기계로 교체되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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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엄마는 부엌에서 쓰던 부지깽이며 수수빗자루가 모지라져 짧아져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 그것들은 우연히 부엌 나무청 한켠 나뭇더미 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삭아 사라질지언정 엄마나 우리 손에 들려 중동이 부러지면서 폐기처분되는 운명을 겪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 단순한 이분법에 푹 빠져 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을 기계나 도구쯤으로 보고 언제든 폐기처분할 수 있다고 보는 차가운 생각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공공연히 퍼져 있는 것 같아 두렵다. 실상 기계나 도구도 함부로 버려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든 언제든 그런 끔찍한 운명을 경험할 수 있다. 나는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그런 곳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