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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02. 2020

고통스러운 글쓰기가 나를 기쁘게 한다

호모 라이터스_글쓰기의 민주주의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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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글쓰기가 정말로 힘들기 때문이다. 윌리엄 진서가 《글쓰기 생각 쓰기》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절망의 순간에 기억하기 바란다면서 남긴 말이다. 글쓰기가 힘든 까닭이 글쓰기가 정말로 힘든 일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 큰 절망에 빠지게 한다. 우리는 글쓰기를 포기해야 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글을 쓰는 데 동원되는 기술과 글을 쓰는 사람의 태도에 의존하는 측면이 크다. 그런데 글쓰기 기술은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것이며,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 여하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모두 경험을 자주 해서 익히 알고 동의하는 사실이겠지만, 특정한 자세와 태도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갖춰 놓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내심과 뼈를 깎는 노력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어떤 기술을 오랫동안 갈고 닦아 숙련화하는 과정과 비슷하며, 한두 가지 조잡한 기술만 활용하던 단순 노동자가 자기 고유의 기예를 구사할 줄 아는 장인이 돼가는 것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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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요령이나 원칙은 단순하다. 쓰고, 또 쓰고, 거듭 쓰면 된다. 일상 다반사처럼 습관적으로 글을 쓰거나, 자기가 정한 시간을 정해 쓰면 좋다. 이렇게 하는 데 무슨 고도의 비결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글을 써 나가는 과정에 복잡한 공정이 작용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쓰고 쓰기를 되풀이하다 보면 글 쓰기 기술에 관한 이치가 트이고, 그렇게 글쓰기 이치가 트이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된다.


글을 쓰는 일은 일종의 노동 같은 것이다. 대개 노동이 그렇듯, 그것은 오직 몸으로 시작하고 몸으로 끝난다. 이치가 그렇다. 책상 앞에 앉아야 첫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끝까지 입술을 앙다물고 마지막 문장을 토해낸 다음에야 의자에서 일어날 수 있다. 글쓰기에 관한 욕망은 다만 마음에서 비롯하지만 글쓰기 자체는 수미일관 몸의 작용이다.


노동은 일련의 과정을 버텨내는 과정 자체이자, 시간과 벌이는 싸움이다. 나는 노동 같은 글쓰기 또한 그렇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독자들이 두 말 없이 동의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노동의 과정 안에서 버티는 일은 무척 힘들며,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수시로 노동의 컨베이버 벨트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꿈꾼다. 우리가 기댈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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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쓰기 과정을 계속 유지시켜 주는 힘이 자기 규율이라고 생각한다. 규율은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극적 보상이나 처벌을 기제로 하는 외적 규율을 제외하고 보면, 가장 효율적인 통제나 관리는 자기가 스스로를 규율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글을 쓰는 데 적용하는 나름의 원칙이나 기준 같은 것을 정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꾸준히 글을 쓰기 힘들다.


나는 일기장에 매일 단 하나의 문장이라도 써 넣는 원칙을 세워 실천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 길거나 짧은 독후감이나 서평을 꼭 써야겠다고 마음 먹고 실행한다. 한 편의 글로 풀어 옮기고 싶은 글감이나 주제가 떠오르거나,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나 읽고 있는 책에서 좋은 글쓰기 소재를 발견하면 휴대전화 메모장에 메모를 해 두었다가 반드시 글로 쓴다.


글쓰기 원칙이나 기준은 사람마다 수준과 양상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영국 소설가 앤서니 트롤럽은 해 뜨기 전 기상해 5시 반부터 8시 반까지 책상 앞에 앉아 소설을 쓴 뒤 출근했다고 한다. 트롤럽은 회중시계 하나를 앞에 두고 15분에 최소한 250자를 쓰는 규칙도 지켰다. 나는 언젠가 소설가 이인휘 씨가 에스엔에스(SNS)에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고 내 휴대전화 메모장 앱에 입력해 놓았다. 


“전 공장을 다닐 때처럼 출퇴근 시간을 갖고서 글을 씁니다.”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 이들 두 사람의 사례를 본보기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의 사례는 우리에게 글쓰기 규율의 본질적인 특성을 시사해 주는 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을 진정으로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의 기쁨을 기꺼이 즐길 줄 알며, 글을 쓴 후에 느끼는 노곤하지만 뿌듯한 보람을 안다. 


나는 이것이 글쓰기에 담긴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모순성과 이중성이며, 트롤럽과 이인휘는 그러한 모순성과 이중성이 주는 행복을 기꺼이 누릴 줄 알았다고 생각한다. 평소 글쓰기를 습관처럼 하고, 글을 쓰고 싶어 한 번쯤 몰입해 글을 써 본 사람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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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은 영화 <황금광 시대>에서 닭 몸짓을 연기하기 위해 석 달 동안 양계장에 다녔다고 한다. 소동파는 한 친구가 <적벽부>를 며칠만에 지었느냐고 묻자 단번에 지었다고 대답했으나, 그가 앉은 자리 아래쪽에는 초고더미가 한 삼태기나 놓여 있었다고 한다.


나는 여러분이 찰리 채프린이 석 달 동안 양계장에 다니고, 소동파가 초고가 한 삼태기 분량이 되도록 글을 썼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채프린이 양계장을 오가면서 머릿속으로 떠올린 양계장행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닭 몸짓을 ‘연기’하기 위해서였다면 닭 연기 교본을 만들어 그대로 반복 연습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소동파는 못 쓰게 된 초고를 구겨 내던지는 순간 열패감이나 좌절감을 느꼈을 법하다. 그런 느낌이 소동파를 다만 힘들게 했을까.


우리는 찰리 채프린과 소동파의 에피소드에서 글 쓰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우리가 글쓰기를 하면서 기대는 두 가지 요소, 곧 글쓰기 기술과 태도는 반복 속에서 만들어지고 길러진다. 그것이 보통의 단조로운 반복과 다른 점은 되풀이되는 시간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글쓰기 근육을 키우는 데 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컨베이어 벨트는 반복 회전을 하다가 언젠가 닳아 끊어진다. 나날이 글을 쓰는 손과 머리는 결코 끊어지는 법 없이 살아 움직이는 글쓰기 근육을 만든다. 채프린과 소동파는 반복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것이 가져올 힘을 믿었기에 단조로운 반복이 주는 지겨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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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동 삼아 천천히 하는 달리기를 무척 좋아한다. 집 근처에 호수 하나가 있다. 둘레 수변길 전체 길이가 8킬로미터쯤 된다. 그 길을 일주일에 서너 번씩 뛰는데, 나는 평상시의 완만한 호흡 주기가 급박해지는 시점부터 조깅의 진짜 맛을 느낀다.


달리기를 시작해 10여분이 지난 뒤부터 내 심장은 힘겹게 출렁거린다. 목이 타들어가고,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팽팽한 긴장통을 안겨 주기 시작한다. 그때 나는 이마를 스쳐 지나는 시원한 바람과, 얼굴과 목과 등과 팔다리를 타고 끝없이 흘러내리는 땀의 율동을 기운 삼아 운동화로 땅을 더욱 힘차게 박찬다. 종착점에 도착했을 때 나는 호수 둘레를 한 바퀴 뛰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뛰기 과정을 묵묵히 즐길 수 있었다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스러워한다.


글쓰기 역시 그런 조깅과 비슷하다. 글쓰기에는 요령이 없다. 달리고 달리며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달리기 근육이 강해지는 것처럼,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글을 쓰는 일 그 자체에 몰입해 쓰고 또 써야 한다. 반어적으로 들리겠지만, 쓰기를 거듭하는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글을 쓰는 일이 주는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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