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미추홀 형제의 슬픈 이야기를 들으며
1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을까. 초봄이었지만 햇살 나른한 어느 날이었다. 아침 내내 온몸이 시들시들했다. 학교에 가서도 도무지 교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조퇴를 했다. 등하교 길마다 오가는 잿마루 위로 해가 막 떠올라 있던 이른 오전이었다.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분이 묘했다. 그때까지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에는 나가야 하며, 학교에 일단 들어서면 무슨 일이 있어도 수업을 모두 마치고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결석이니 조퇴니 하는 말들을 머릿속에서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내가 성실하고 모범적인 어린이여서 그랬던 건 아니다. 학교를 오가던 길에는, 집으로 향하는 재마루 한쪽에 숨어 있다가 홀연히 나타나 우리를 괴롭히곤 하던, 근처 동네에 살던 무서운 형과(나는 그 형에게 두어 번 잡혀(?) 풀을 날라 주거나 밤을 줍는 일을 해야 했다.), 길 가던 우리에게 낫을 휘두르기도 했던 아랫동네 한길 옆의 늙수구레한 대머리 아저씨가 있었다. 난 혼자서 그들을 마주치는 일이 두려웠다.
다행히도 무서운 형과 대머리 아저씨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초봄의 서늘한 냉기가 코끝에 밀려왔다. 부엌으로 나가는 정지문 바로 아래에 양은 밥상이 있었다. 상보를 들추자 숭늉물이 든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이 간장 종지와 김치, 우거지국과 함께 밥상 위에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이 밥상머리에 앉아 허술히 아침을 드시고 일하러 나가셨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문득 왠지 모를 따뜻함과 편안함(부모님이 우리 자식들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사시는 것이 고맙고 든든했다.) 한편으로 두려움과 서러움과 아득한 절망감(‘그런 부모님이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나신다면 지금 이렇게 아무도 없는 괴괴한 집처럼 모두 홀로 살아 나가야겠지?’)을 느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2
일자리를 구하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던 중 끼니를 해결하려고 라면을 끓이다가 화재가 나 중화상을 입은 인천의 어느 형제 소식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 작은 손들 위로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 삼촌과 이모, 이웃집 다정한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따뜻한 손길이 넉넉히 오갈 수 있었다면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형제는 주변의 별다른 도움이나 지원 없이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채 지냈다고 한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등 보육시설에 다닌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종종 아동 급식카드를 들고 근처 편의점에 가 김밥이나 우유 등을 사 끼니를 해결했다고 한다. 엄마는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를 앓던 8살짜리 동생을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현재 <아동복지법>상 방임과 신체적 학대 혐의 적용을 받아 검찰에 송치되었다.)
두 형제는 아직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기구한 삶을 라면 한 그릇과 바꾸기에는 10년과 8년이라는 세월이 서럽도록 짧다.
3
어린 형제가 겪은 비극이 불우한 집안에서 태어난 얄궂은 운명 때문이었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대다수 어린이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닌다. 학교에서 조퇴를 해 홀로 집에 가더라도 텔레비전이나 게임기 등 이런저런 볼거리와 놀거리가 있으니 홀로 외로움에 떨 필요가 없다. 얼마나 풍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인가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다정하게 손길과 눈길을 주고받는 일만큼 좋은 어린이 돌봄이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이나 게임기가 해 줄 수 없는 것들이다. 시장과 일터에 간 엄마와 아빠를 기다리며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에서)는 아이들이 다치거나 죽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