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인 우리 집 둘째에게는 ‘규범주의자’, ‘원칙론자’ 같은 중후한(?) 별명이 있다. 최고 속도가 100킬로미터인 고속도로를 지날 때 둘째의 잔소리 폭탄을 피하려면 100킬로미터를 절대 넘어서는 안 된다. 실선이 그어진 부분에서 차선을 바꾸면 점선을 보고 바꾸어야 한다며 한바탕 엄한 훈계를 내린다.
언젠가 둘째가 국어 교과서를 보며 공부하다가 우리말 문법에 관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높임말의 쓰임새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확실하게 기억 나지 않는데, 아들은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과서에서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아요.’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내가 조금 답답하여 교과서 내용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자 아들은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아빠가 쓴 책도 그래요?”
“당연하지. 책에 쓰였다고 모두가 완벽하다고 말할 순 없단다.”
아들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소신을 금방 굽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여전히 교과서와 책이 그럴 리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우리는 오랫동안 ‘어떤 책에 이렇게 씌어 있다’라는 말을 진리와 진실의 보증수표처럼 여기던 시절을 거쳐 왔다. 글과 문자는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나 경건한 사물처럼 숭배되었다. 어떤 사람이 글 자체에 어떤 권위가 담겨 있다고 느낀다면, 그가 느끼는 권위의 상당 부분은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가 그런 역사를 알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기질적으로 규범과 규칙을 잘 따르는 유형처럼 보이는 둘째에게 책, 그것도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과서에 실린 내용은 위엄과 권위의 상징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글을 쓰는 사람[author]과 권위(authority)가 같은 어근을 공유하고 있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글을 쓰면서 진정한 권위를 생각하지 않는 작가나 저자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쓰는 글이 독자들에게 권위를 갖기를 바랄 것이다.
진실을 담은 글을 향한 그들의 고민, 글을 통해 세상사 진리를 밝혀 내려는 그들의 열정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은 우리를 해치는 제일 적병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3
책 한 권으로 세상을 흔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에 강렬한 흔적을 남기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때로 그들이 쓴 이야기는 너무 평범하다 못해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이야기로 장안의 지가를 올렸으니 나라고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제 당신은 삶의 비밀이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믿음 하나로 진실이라는 이름의 폭주기관차에 올라탄다. 가자, 내 아름다운 글이 기다리는 곳으로.
그러나 열차는 이름으로만 ‘폭주’한다. 거대한 포효를 내지르며 질주할 것 같은 그 열차는 출발은커녕 시동도 제대로 걸지 못한다. 당신을 내내 휘감던, 그 아름다운 글을 향한 정체 모를 고양감과 열의는 온 데 간 데 없다. 당신은 마치 글로 벌을 서야 하는 말썽꾸러기 학생처럼 어쩔 줄 몰라 한다.
4
멋진 글을 쓰려고 진실이라는 이름의 폭주기관차에 올라 탄 당신은 독일 작가 지그프리트 렌츠가 쓴 장편소설 <독일어 시간>에 나오는 지기 예프젠이 처한 상황과 흡사하다.
소년원에 수감된 예프젠은 교화용 프로그램으로 개설된 독일어 시간에 심리학 박사 코르프윤에게 ‘의무의 기쁨’이라는 테마의 작문 과제를 부여받는다. 예프젠은 마침 순순히 의무의 기쁨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너무나 할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다. 코르프윤이 예프젠을 비롯한 소년범들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좋다. 다만 내용이 의무의 기쁨을 다룬 것이면 된다.”
예프젠은 꼬박 하루 동안 글의 서두를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진실의 폭주기관차에 올라 탄 당신도 예프젠과 비슷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당신 앞에는 써야 할 이야깃거리들이 쌓여 있으며,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써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당신은 하루를 지나 이틀이 다 되도록 첫 문장의 첫 번째 단어조차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예프젠은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기억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발췌하거나 요약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쓰고 싶었으나, 기억 속의 사건과 인물과 배경들이 너무 많아 쉽게 정리하지 못했다.
예프젠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 앞에는 쓸 수 있는 것, 써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것들은 모두 진실을 보증한다. 그런데 그것은 말하자면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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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한 편의 글이 일말의 진실을 담을 수 있다면, 나는 진실이 그런 방식으로 글에 담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