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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07. 2016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 무서웠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1)

1


은석이(가명)는 눈빛과 말투가 강렬했다. 재작년 3월 초 어느 수업 시간이었다. 나는 일부러 은석이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었다. 은석이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차갑고 냉소적인 기운이 부담스러웠다.


개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은석이 반에서 하는 수업을 두어 시간 하고 난 뒤였다. 속된 표현으로 아이들과 교사가 서로 ‘간을 보는’ 시기였다.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관계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눈치 작전이 펼쳐졌다.


은석이를 향한 내 눈길이 ‘간 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관심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은석이는 ‘간 보기’로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은석이의 ‘무서운’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눈길을 주었다.


일부러(!) 이글거리는 눈빛을 ‘연출하는’ 게 힘들어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였다. 은석이는 눈에 잔뜩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교과서며 학습지를 쳐다보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들썽이던 마음이 자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날 점심 때였다. 은석이와의 ‘극적인’ 만남이 있었다. 교무실 바로 앞에 있는 우리 반 교실에서였다. 한 아이를 보기 위해 잠깐 교실에 들어섰다. 공교롭게 은석이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창문을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조그만 농구장이 창 너머에 있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긴 복도를 끝까지 걸어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창문 길이 일종의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은석이 곁에 있던 성우(가명)를 불렀다. 은석이 앞에서 창문에 덧댄 철주를 붙잡고 막 창을 넘으려던 참이었다.


“성우야, 창문을 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예? 아니 괜찮아요.”


삐딱한(?) 목소리로 건성건성 대답하며 다시 창문을 넘으려고 했다. 엄한 표정과 단호한 손짓으로 성우를 불렀다. 성우가 못마땅하다는 몸짓을 지으며 다가왔다. 두 손으로 성우의 어깨를 지그시 붙잡고 다시 찬찬히 이야기했다. 표정에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깨를 붙들고 있는 내 손을 빼내려고 두 팔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성우는 ‘도전적인’ 눈빛이 여느 아이 못지 않게 강한 녀석이었다.


은석이가 다가왔다. 말없이 성우와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재미 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게 묻어나는 듯했다. 나는 둘을 번갈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석아, 성우야, 창문으로 넘어가면 안 돼. 다치잖아. 저쪽으로 돌아서 가거라.”


문득 은석이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가 보였다. 말을 마치면서 손끝으로 살짝 닦아 주었다. 은석이가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손등으로 입 주변을 다시 문질렀다. 그런 표정과 동작을 만들어내는 은석이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내게 던지던 오전의 은석이가 아니었다.


나는 한 번 더 창문을 넘지 말라고 말하며 뒤돌아섰다. 은석이와 성우는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 교무실로 들어서면서 등을 돌려 녀석들을 보았다. 언제 내 말을 들었느냐는 듯 창문 철주를 붙잡고 장난하고 있었다. 창문을 넘어가지는 않고 있었다. 한 마디 더 할까 하다가 돌아섰다.


2


교사들은 대체로 자존심이 세다. 2000년대 이후 교직에 들어서는 문이 좁아져서인지 최근 교사들 사이에 그런 경향이 더 강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많은 교사들이 아이들을 ‘이겨 먹으려고’ 한다. 어떤 교사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아이들을 자유자재로 통제하거나 제압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을 ‘당해내지’ 못하는 교사들은 공공연히 무능하고 무기력한 교사로 찍힌다. 학기 초 아이들을 옥죄는 이유다. 아이들을 향해 윽박을 지르고, ‘뺀질거리는’ 아이들에게 겁을 준다. ‘협상’으로 구슬르고 ‘협박’으로 압박한다. 조그만 실수를 쉽게 받아들이지지 못한다. 학년 초 담임들은 조・종회 때마다 원칙과 규율과 질서를 강조한다. 일벌백계라는 말을 즐겨 쓴다.


아이들을 다루는 교사의 ‘교육적인’ 방식과 태도란 어떤 것일까. 그나는 군림하고 억압하는 교사가 이른바 몇몇의 ‘문제아’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아이들에게 더 큰 폐해를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힘의 열세에 눌려 부당한 권력이나 권위에 눈치껏 순응하는 것이 일신의 편안함을 가져다 준다는 식의 ‘처세술’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해서다. 이런 아이들에게서 정의롭고 교양 있으며 민주적인 시민상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이른바 ‘중2병’에 걸린 ‘환자’들이 30여 명 넘게 살아가는 중학교 교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복잡다단한 ‘호르몬’의 영향력 아래 있는 아이들이라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 엄격한 권위나 규율이 불가피해 보인다.


일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해서 안 되는 문제가 있다. 많은 이가 ‘중2병’이니 ‘괴물’이니 하는 말로 뭉뚱그려 말하지만, 대다수의 중2 아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스페인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교육심리학자인 호세 안토니오 마리나는 사춘기 청소년의 대다수가 가족, 친구와 함께 잘 지낸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춘기의 호르몬 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또 다른 변화가 있다. 사춘기 청소년들의 뇌는 큰 변화를 겪고 더욱 효율적이 된다. 몇 세기 동안은 인간이 학습하기 가장 좋은 나이가 3살이나 4살 정도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배움의 황금기가 사춘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두뇌의 전두엽의 성숙은 통제 시스템의 성숙과 관련이 있다. - 호세 안토니오 마리나(2016), <두려움과 용기의 학습>, 책세상, 218쪽.     


‘허세 작렬’에 ‘꼴통 짓’을 하면서 반항하는 아이들조차도 사실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다 컸다고 여기면서도 변덕스러운 행동과 모순적인 생각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치기를 드러낸다. 허세와 반항이 그 증거나 아닐까. 그런 아이들을 어른들이 ‘이겨 먹으려고’ 한다. 그럴 수 없고, 그래서 안 되는 일이다.


우리 학교에는 일명 ‘복도파’가 있다. 아이들 사이에서 힘께나 쓰는 ‘껄렁거리는’ 아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휘젓고 다니는 데서 생겨났다. 은석이도 그런 ‘복도파’ 중 하나였다. ‘껄렁거리며’ 복도를 오가는 은석이는 먹이 구하기에 바쁜 날다람쥐 같다.


그런 와중에 은석이가 종종 교무실로 와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내 자리 근처에 슬슬 눈치를 보았다. ‘은석이 무슨 일 있냐’고 물으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별다른 대답도 없이 어깨를 건들거리며 교무실을 빠져 나갔다. 복도를 걸어가면 일부러 다가와 인사를 하기도 했다. 처음 내게 던진(것으로 내가 착각했을지 모르는) ‘이글거리는’ 눈빛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교과서와 학습지를 챙겨 온 은석이가 학습지에 무언가를 부지런히 쓰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무언가를 적고 있는 은석이가 얼마나 대견스럽고 의젓했는지 모른다. 한 시간 내내 눈빛만 주고받은 게 엊그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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