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기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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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언어 기원설은 프삼티크족의 실험이나 바벨탑 이야기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최신 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현대의 연구자들 중에서도 단일 언어 기원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2011년 4월, 뉴질랜드대학교의 쿠엔틴 앳킨슨(Quentin Atkinson) 교수는 세계적인 과학 잡지 <사이언스(Science)>에 ‘음소 다양성이 증명하는 창시자 효과의 연쇄와 언어의 아프리카 기원설’이라는 긴 제목의 논문을 싣는다. 논문의 핵심 취지는 현재 인류의 언어가 모두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창시자 효과(founder effect)’는 원래 생물학에서 쓰이는 개념이었다. 어떤 생물종이 한 지역에 오래 거주하면 유전자 변형이 축적되어 다양한 후손들이 생겨난다. 그런데 그 집단의 일부가 좀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 거주 밀도가 느슨해지면서 다양성이 줄어든다. 이러한 현상을 생물학에서는 ‘창시자 효과’라고 부른다. 창시자 효과에 따른 유전자 다양성을 지역별로 조사하여 그 경로를 역추적하면 어떤 생물종의 기원을 알 수 있다. 앳킨슨 교수는 이를 최초의 언어를 추적하는 데 활용한 것이다.
앳킨슨 교수가 최초 언어의 기원을 찾기 위해 동원한 또 다른 개념은 ‘음소(phoneme)’였다. 언어학에서 음소는 언어를 구별할 수 있는 최소 단위, 곧 자음과 모음이다. 그는 어떤 언어에 음소의 종류가 많을수록 언어 다양성이 풍부하다고 전제한다. 이어 창시자 효과의 개념을 활용하여 최초 발생지로부터 멀어질수록 창시자 인구(최초 거주지에 살았던 집단의 구성원들)의 밀도가 낮아지는 것처럼, 언어 또한 최초 발생지로부터 멀어지면 음소 수가 원래보다 줄어들 것이라고 보았다.
앳킨슨 교수의 관점에 따르면 음소의 개수가 가장 많은 언어가 최초의 언어에 가까운 것이 된다. 음소 다양성이 가장 풍부한 언어가 최초 언어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논리다. 이를 밝히기 위해 ‘세계언어지도(WALS)’에 있는 현존하는 504개의 언어를 선정한 뒤 음소를 추출해 목록의 규모를 조사했다. 그 결과 아프리카 남서부 지역의 음소 다양성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각 언어의 음소 다양성은 이 지역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앳킨슨 교수는 인류 언어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앳킨슨 교수의 주장은 일 년만에 매서운 비판을 받는다. 2012년 2월 10일 독일 뮌헨에 있는 루트비히막시밀리안대학교의 미헬 쉬조(Michael Cysouw) 교수를 포함한 세 명의 연구자들이 앳킨슨 교수의 논문 오류를 지적하는 반박 논문을 <사이언스>에 실었다. 이들은 먼저 앳킨슨 교수의 논문이 세계언어지도에 있는 자료를 부적절하게 활용하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앳킨슨 교수가 ‘인간 개체 내의’ 유전자에 적용되는 ‘다양성’ 개념을 ‘여러 언어 사이의’ 음운론적 차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적용했다는 점도 비판했다. 생물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활용되는 ‘창시자 효과’라는 개념이 언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점도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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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언어 기원설은 인류 기원과 관련한 고고인류학 분야의 최신 연구 결과와 어긋날 때가 많다. 그동안 고고인류학계에서는 단선 진화론을 인류의 기원과 관련한 주류 견해로 인정해 왔다. 단선진화론은 하나의 호미니드(Hominid, 인간 종)가 사라지면 다른 호미니드가 뒤를 이었다는 주장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에서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의 진화 과정을 따른 셈이 된다.
그런데 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현대의 고고인류학은 인류의 기원을 주로 복수 종(複數種) 이론으로 설명한다. 2012년 8월 7일 케냐 나이로비 투르카나 유역 연구소의 미브 리키(Meave Leakey) 교수와 루이즈 리키(Louise Leakey) 박사 공동연구팀이 세계적인 과학 저널인 <네이처(Nature)>에 인류 기원에 관한 한 이론을 발표했다. 인류의 조상 중 여러 종의 호미니드가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살았다는 복수 종 이론이었다. 이들의 연구 결과는 약 200만 년 전 아프리카 케냐 지역에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루돌펜시스(Homo Rudolpensis), 호모 에르가스테르(homo ergaster) 등의 호미니드 세 종이 함께 살았다는 사실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언어 역시 이와 비슷한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의 언어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 과정 속에서 점점 발달했다고 보는 다중 언어 기원설이 대표적인 이론이다. 다중 언어 기원설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여러 언어들 간의 상호 작용과 간섭 속에서 개별 언어로 발달한다고 본다. 모든 인류 언어의 뿌리에 해당하는 최초의 어떤 말은 없다. 그런 것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다중 언어 기원설은 오늘날 언어진화학계 내에서 지배적인 견해로 자리 잡고 있다.
단일 언어 기원설의 근거로 아이들의 말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조금 부풀려진 면이 있다. 어린이, 특히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하는 2, 3세의 유아기 아이들은 발음 기관이 덜 성숙한 상태에 있다. 이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불완전하다. 서로 비슷하게 말하는 것도 특징적이다. 많은 언어권에서 ‘아빠’, ‘엄마’를 ‘papa’, ‘mama’로 부르는 것이 구체적인 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세계의 언어가 하나의 말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들과 다른 예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옛 소련 지역의 조지아어(Georgian, 옛 그루지아어)나 호주 원주민 언어 중 하나인 피찬차차라어(Pitjantjatjara)에서는 ‘mama’가 ‘아빠’를 뜻한다. ‘papa’는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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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언어 = 신의 선물’과 같은 관점은 일종의 ‘선물설’로 부를 수 있다. 이와 달리 언어를 인간이 만들어 낸 발명품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른바 ‘발명설’이다. 발명설은 역사가 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로부터 중세 시대의 요하네스 코메니우스(Johannes Commenius, 1592~1670), 근대 철학자 루소(Jean Jacque Rousseau, 1712~1778)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발명설을 지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언어의 발명자는 사려 깊고 지혜로운 ‘명명관(命名官)’이다. 명명관이 모든 사물의 천성이나 본성에 맞게 이름을 짓는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은 흔히 ‘땡땡설(ding-dong theory)’로 불린다. 종을 치면 ‘땡’ 하고 소리가 나는 것처럼 어떤 사물이 갖는 고유의 소리를 인간이 지각한 대로 표현하려는 데서 언어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요하네스 코메니우스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교육학자이다. 그는 <그림으로 보는 시각적 세계>라는 책에서 동물의 울음 소리나 인간의 숨소리가 언어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펼쳤다. 코메니우스의 견해는 인간의 말이 자연의 소리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관점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루소는 <인간 언어 기원론>이라는 책에서 최초의 언어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원시 시대의 숲속에서 방랑하고 고립된 채 살아가던 최초의 인간들을 상상했다. 그들에게 말이 있었을까.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인류의 최초 언어가 최초의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내뱉은 울부짖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사람은 위험에 맞닥뜨리면 비명을 지른다. 극심한 고통을 호소할 때는 크게 소리를 낸다. 그런 소리들이 최초 언어의 뿌리라고 여겼다.
루소는 원시인들이 동물이 내는 소리를 흉내 내고, 그것을 좀 더 정교하게 하면서 최초의 언어 체계를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위험한 상황에서 원시인들이 개가 짖는 소리를 모방하여 ‘멍멍’과 비슷한 소리를 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 후 ‘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처음에 낸 ‘멍멍’ 비슷한 소리가 ‘개’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런 식으로 점점 더 많은 단어가 차곡차곡 쌓인다. 하나의 언어가 완성되는 과정을 그렇게 이해했다.
코메니우스나 루소가 주장한 최초의 언어에 관한 가설은 이른바 ‘멍멍설(bow-wow theory)’로 불린다. ‘멍멍설’은 논리적인 허점이 있다. ‘멍멍’이나 ‘휘잉’과 같은 의성어는 동물(개)이나 자연(바람)의 소리를 모방한 말의 보기들이다. ‘멍멍설’이 맞다면 전 세계 언어에서 쓰이고 있는 개의 울음이나 바람 소리는 모두 똑같거나 적어도 비슷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 개들이 짖는 소리는 (적어도 언어로 표현되는 한에 있어서는) 다 다르다. ‘멍멍’이나 ‘컹컹’ 하고 짖는 개는 우리나라 개뿐이다. 미국 개는 ‘바우와우(bow-wow)’ 하고 짖는다. 인도네시아 개는 특이하게도(?) ‘공공(gong-gong’ 하고 운다. ‘멍멍’과 ‘컹컹’, ‘바우와우’와 ‘공공’을 같은 소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어의 기원에 관한 학설(?)에는 몇 가지가 더 있다. ‘쯧쯧설(pooh-pooh theory)’은 ‘쯧쯧’, ‘오오’, ‘저런’과 같이 감정을 표현하는 말에서 언어의 기원을 찾는다. ‘노래설(sing-song theory)’은 사람들이 신을 모시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치를 때 함께 부르는 노래에서 최초의 언어를 탐색한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일을 할 때 내는 소리에서 언어의 뿌리를 찾는 ‘끙끙설(grunt theory)’도 있다.
이들은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힘들어 단순한 가설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최근에는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좀 더 과학적인 접근법을 활용해 언어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연구자가 진화생물학이나 생리학, 고고인류학과 같은 여러 연구 분야의 성과를 통합적으로 활용한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최근의 연구자들은 우리의 먼 조상 인류가 언어를 갖기 위한 많은 전제 조건을 채워 가면서 긴 시간을 거쳐 왔으리라 가정한다. 그 길은 어떠했을까. 우리의 조상 인류가 그 과정에서 하나하나 채워 간 조건들은 무엇이었을까. 다음 글에서 그 기나긴 여정을 따라가 보자.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장 자크 루소다. 한국어 <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C%9E%90%ED%81%AC_%EB%A3%A8%EC%86%8C)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