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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15. 2016

부모의 ‘그림자 투사’, 자식 질식시킨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8)

1


형규(가명)는 성적이 상위권이다. 점수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학원에 다니면서 전 과목을 수강한다.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한다. 형규 못지 않게 성적과 점수에 욕심이 많은 엄마의 강요가 더 큰 이유다.


형규 엄마가 그러는 건 형규 동생 때문이다. 형규 동생은 전교 1, 2등을 다툰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학교에서도 모범생 소리를 듣는다. 그런 동생에 대한 열등감 탓일까. 형규는 공부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형규 부모가 먼저 형규를 편하게 대해 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부모들이 먼저 나서서 형규를 은연중에 압박하는 듯하다. 형규가 과도하게 성적에 집착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인 것 같다.


선우(가명)는 성적이 중상위권이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하는 말을 얌전히 잘 듣는다. 친구 관계나, 화장하고 멋 내기 등 여학생 특유의 문제와 관련한 것만 빼면 평범한 학생이다. 내가 보기에 선우에게는 특별한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선우 엄마다. 선우에게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면 선우 엄마가 학교로 직접 전화를 한다. 선우가 해도 될 말을, 선우 엄마는 선우의 대변인이 되어 세세하게 대신 일러 준다. 그래서 나는 선우의 얌전함이 소심함과 소극성으로 다가온다. 엄마 때문에 주눅 든 것처럼 다가온다.


시형(가명)은 성적이 하위권이다. 주로 어울리는 또래들은 학교 안에서 말썽꾸러기들이다. 학교 공부에 관심이 없다. 그래도 시형이는 선생님들이 무슨 말을 하면 ‘네, 네’ 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안다. 교사 말을 귓등으로 흘리는 아이들과는 달라 보인다.


부모 앞에서는 그렇지 않는 것 같다. 몇 마디 말을 나누다 금방 윽박을 지르는 아빠와 특히 사이가 안 좋다. 대놓고 대들 때도 있다. 시형 엄마는 그런 아들이 믿기지 않는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시형은 성실하고 고분고분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모습이다.


시형 엄마는 아들 성적이 떨어지고 아빠에게 대드는 이유를 학교 안에서 말썽쟁이들과 어울리는 데서 찾는다. 아들이 주변 친구들 때문에 나쁜 길로 빠졌다고 보는 것이다. 착하고 순하던 자신의 아들이, 이른바 ‘질 나쁜’ 친구들 때문에 변했다고 여기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부모의 모습이다.


2


아이들의 문제가 가정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부모 불화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평온하지 못하다. 자식을 끊임 없이 간섭하는 ‘교육열(또는 교육욕)’ 높은 부모 때문에 아이들이 질식한다.

아이가 공부를 잘 하거나 못 하거나 하는 것과 상관 없다. 성적이 좋은 아이는 그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아이는 좋지 않은 성적에서 벗어나려고 부모의 자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형규의 상황을 알게 된 것은 학년 초 짧은 상담을 통해서였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함께 칼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형규야, 학원 다니는 건 어때?”
“재미 없어요. 지겨워요. 힘들고요.”
“그렇구나. 형규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거 엄마는 아셔? 엄마랑 얘기는 나눠 봤니?”
“얘기해 봐야 소용 없어요. 엄마랑은 말이 안 통해요.”


그뒤부터 형규는 묵묵히 칼국수만 먹었다. 묻는 말에도 짧게 ‘네’나 ‘아니오’로만 답했다. 하긴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형규로서는 담임인 내게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다 말한 셈이었다. ‘지금 내가 하는 공부는 내 바람과 의지에 따른 게 아니다’라는.


상담을 하면서 아이들 대다수가 학원 다니는 일을 무척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학원 공부에서 재미나 의미를 찾는 아이들은 두어 명밖에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학원 때문에 친구들과 제대로 놀지 못하는 걸 가장 큰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스스로 공부하는 일의 재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만의 계획과 방식으로 공부하는 습관이나 태도를 기르지 못하는 문제 또한 심각해 보였다.


선우 문제도 이런 상황과 관련되는 듯하다. 엄마가 모든 것을 챙기니 선우가 무언가를 스스로 하려고 마음 먹을 필요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선우의 얌전함과 침묵이 엄마가 강요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선우는 마치 엄마가 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 같다.


3


시형의 경우는 “‘다른 아이는 몰라도 내 자식만은’주의”에 빠진 엄마의 문제가 크다. 시형 엄마는, 일방적인 훈계를 대화로 여기는 시형 아빠가 문제라는 점을 잘 안다. 욱 하는 태도 때문에 시형이와 티격태격하는 남편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하지만 거기까지만이다. 내가 보기에 시형이 부모님께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는 않다. 시형 아빠는 직장 문제 때문에 따로 생활한다. 이로 인해 시형이가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이나 아빠와의 거리감 같은 게 시형이의 일상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시형 아빠에 대해서 몇 마디 하고 싶다. 자식과 ‘대화’를 나눈다는 아빠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훈계나 강압적인 지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깨인 아빠라며 자식에게 먼저 말을 걸지만 결국 자신의 주장만 펼친다.


시형 아빠의 태도는 대한민국의 많은 아빠가 안고 있는 문제다. 2010년 여성가족부에서 전국가족실태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고 한다. 조사 내용 중에 아이들이 고민이 있을 때 누구와 상담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아빠와 상담하겠다는 아이들은 0.9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약 60퍼센트는 아이들이 자신들을 대화 상대로 생각한다고 믿는단다.[이승욱 외(2012), <대한민국 부모>, 122쪽 참조]


4


아이들은 가족의 현실이나 부모가 갖고 있는 자녀관과 양육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문제 부모 아래서 문제아가 생겨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녀를 자신의 손아귀 안에 쥔 채 쥐락펴락하려는 부모들, 자식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여기는 부모들, 공부 잘 하고 좋은 대학 가는 자식을 통해 대리 만족하는 부모들이 대한민국 부모들의 자화상이다.


이들은, 삶의 보람과 의미를 자식에게서 찾으려는 자신들이 아이들을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자식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라며 자식들을 철저하게 뒷받침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희생과 사랑으로 포장한다. 그것이 자식들을 질식하게 하고, 대책 없이 엇나가게 하는 것인 줄도 모른 채로 말이다.


최광현 한세대 트라우마가족치료 연구소장은 <가족의 발견>에서 부모 세대에서 자식 세대로 이어지는 ‘그림자 투사’의 문제를 비중 있게 묘사했다. 자식들이 부모의 그림자에 질식당하지 않고 극복하고 살았다 하더라도 그 자녀의 다음 세대는 더욱 강력해진 그림자에 희생당할 수 있다고 한다.


최 소장은 부모와 자녀 간 그림자 투사로 설명할 수 있는 예로 미국 사회의 ‘P.K.’ 문제를 들었다. ‘P.K.’는 미국 사회에서 대표적인 문제아로 낙인찍힌 ‘경찰관의 자녀(ploices kid)’와 ‘목사의 자녀(pastor’s kid)’를 가리킨다. 이들은 자아의 인격에 맞게 살도록 내몰린, 그림자는 무조건 외면하면서 살도록 내몰린 아이들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 둘에 ‘교육자의 자녀’를 보탤 수 있다고 한다.     


‘P.K.’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올바르게 살도록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요구받는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지나친 자아의 확대는 오히려 그림자의 인격이 커지도록 하여 모범생만이 아닌 심각한 문제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문제아는 그 가족의 그림자 투사의 희생양인 셈이다. 자녀에게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중 하나는 부모의 그림자를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 (중략) 그림자를 자녀에게 투사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 스스로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이다. - 최광현(2014), <가족의 발견>, 부키, 160~161쪽.   

  

자식으로부터 ‘졸업’하는 부모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가족 문제 전문가들은 부모가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식 곁에 있으면서 그들이 실수하고 실패하며 아파할 때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구실을 해 주면 된다고 말한다.


부모들이, 자식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삶의 확고한 기준과 원칙을 찾았으면 좋겠다. 남들과 주변을 바라보지 말고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과 가치를 자식에게 전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부모와 자식 간의 따뜻하고 품위 있는 관계가 이런 데서 생겨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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