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균 Sep 20. 2016

자음 ‘비읍(ㅂ)’의 특별한 취향

말소리의 생성 과정 (1)

1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이 먹고 싶다.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밥.”


‘밥’이라는 말을 보자. ‘밥’은 두 개의 ‘ㅂ’ 자음과 ‘ㅏ’ 모음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자음과 모음에 담긴 소리 이미지를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그리고 ‘밥’이라는 말을 다시 천천히 발음해 보자.


 “ㅂ~아~압!”


‘밥’의 첫 번째 ‘ㅂ’ 소리는 어떻게 내야 할까. 당신의 위아래 입술이 서로 애틋해 할 정도로 살짝 맞닿게 한 뒤 곧장 두 입술을 떼면서 적당한 소리를 밖으로 내보내라. 얇은 종이를 입술 가까이에 댔을 때 바람이 거의 일지 않을 정도면 된다. 바람이 일어나 종이가 살짝 흔들리게 되면, 엄마에게는 ‘밥’이 ‘팝’으로 들린다.


이제 당신은 위아래로 살짝 벌어진 입을 더 크게 열어야 한다. 앞에 있는 엄마가 봤을 때 입 모양이 전체적으로 잘 빚어진 송편 모양이 되어 있으면 좋다. 모음 소리 ‘ㅏ’는 특이하게 여러분의 넓은 입 속을 보려는 ‘취향’이 있다! 언어학자들은 각 자음과 모음의 특성을 구별하기 위해 입 벌림 정도를 나타내는 개구도(開口度)주1)를 활용한다. ‘ㅏ’의 개구도는 다른 소리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 6도에 해당한다.


‘ㅏ’의 독특한 취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ㅏ’는 혀가 입 속 공간 낮은 쪽에 낮게 엎드리기를 원한다. 혀 아래쪽에서 나는 저모음(혀의 낮은 위치에서 나는 모음)이기 때문이다. 혀를 입안의 낮은 쪽에 위치시키면 목구멍에서 올라온 소리(공기)가 혀를 미끄러지듯 스쳐 지난다. ‘ㅏ’를 담고 있는 공기는 활짝 열려 있는 입술 사이로 시원하게 빠져 나간다. 중모음(혀의 중간 위치에서 나는 모음) ‘ㅓ’와 고모음(혀의 높은 위치에서 나는 모음) ‘ㅡ’를 연이어 발음해 보라. 저모음 ‘ㅏ’의 특징이 잘 이해될 것이다.


‘밥’ 소리와 함께하는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활짝 열려 있는 당신의 입은 이제 처음 ‘ㅂ’을 만들어 내는 시점과 마찬가지로 다시 굳게 닫혀야 한다. 주의할 점이 있다. 닫힌 입술 사이로 어떤 소리도 빠져 나가서는 안 된다.

입을 제대로 닫지 않아 소리가 빠져 나가버리면 당신이 뱉어 낸 말은 ‘바브(?)’나 ‘바부(!)’가 돼 버린다. 이렇게 되면 당신이 밥을 먹게 될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자식에게 ‘바브(?)’나 ‘바부(바보?!)’ 소리를 듣고 선뜻 밥상을 차려 줄 엄마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한국어에서 받침 소리를 얕잡아보고 대충 발음하면 문제가 생긴다.     


2     


사람은 허파에 공기만 있으면 충분히 말을 할 수 있다. 허파에서 올라와 기도(氣道; 소리가 지나는 통로)로 나가는 공기의 흐름에 약간의 힘을 가하면 된다. 후두에 있는 성대의 긴장이나 진동 등이 필요할 때가 있다. 성대 부위의 긴장이나 진동으로 몸을 한 번 뒤튼 소리 덩어리는 소리 통로인 목구멍,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혀, 이, 위아래 입술 등을 거치면서 ‘말소리’라는 전혀 새로운 옷을 입고 세상으로 나간다.


말을 할 때 얼굴과 혀와 목구멍의 수많은 근육은 적당한 긴장도를 유지해야 한다. 입술이나 혀와 같이 안면 부위 안팎에 입체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기관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좌뇌 브로카 영역에 있는 두뇌 세포의 명령에 따라 이런저런 모양으로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아이들은 이 모든 능력을 완전하게 습득하기까지 아이들은 적어도 10년의 세월을 끊임없이 ‘조잘댄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놀듯 말하기를 연습하면 모어(母語, mother tongue)를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3     


‘말’은 국어사전에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쓰는 음성 기호’로 정의되어 있다. 사전 편집자들은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목구멍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나타내는 소리”라는 뜻풀이도 덧붙여 놓았다. 말이 갖는 개념의 핵심에 ‘음성’, ‘소리’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소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질까.


사전을 찾아보면 ‘소리’는 “물체의 진동에 의하여 생긴 음파가 귀청을 울리어 귀에 들리는 것”으로 풀이되어 있다. 소리가 순전히 물리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소리가 모두 말소리가 될 수 있을까.


‘밥’을 ‘바부’처럼 발음해서 엄마가 밥상을 차려주지 않자 당신이 내쉰 한숨 소리는 말소리가 아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반려견이 쪼르르 달려와 꼬리를 흔들며 ‘낑낑’ 하고 내는 소리도 말소리와 거리가 멀다. 당신의 한숨 소리와 반려견의 ‘낑낑’ 소리는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실망했다는 당신의 감정과, 겉으로 위로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잘 됐구나.’ 하고 고소해 하는 반려견의 ‘이중적인’ 의도(?)가 담겨 있을지라도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들 소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말소리의 여정을 떠난다. 나는 이 여행이, 우리가 원숭이와 분명히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을 겸손하게 확인하는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원숭이와 우리 인간은 모두 이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똑같은 생물체다. 평등한 존재들이다.


원숭이나 코끼리는 우리가 쓰는 말소리를 낼 수 없다. 우리는 원숭이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매끄럽게 점프하거나, 코끼리처럼 길게 10리 밖까지 들리는 초저주파로 동료와 교신할 수 없다. 말은 인간의 전유물이자 특권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원숭이나 코끼리보다 우월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코끼리의 초저주파가 우리에게 무의미한 소리에 불과한 것처럼 사람의 말 또한 코끼리에게는 그저 알지 못할 하나의 소리일 뿐이다.     

4     


말소리가 만들어지는 이 여행을 위해 우리 몸은 기본적인 몇 가지 요소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대뇌 좌반구에 있는 수십 억 개의 뇌세포 조직이 필요하다. 브로카 영역이나 베르니케 영역과 같이 언어 활동과 관련된 두뇌 부위가 두루 온전해야 한다. 말소리가 실제로 만들어지는 후두, 성대, 목구멍, 혀, 치아, 이 등 여러 발음기관에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없으면 말소리를 만들어 내는 일이 불가능한 공기가 있어야 한다. 공기에는 많은 기체가 있다. 그것들이 모두 필요하지는 않다. 대기 성분의 5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산소만 있으면 된다. 지금부터 말소리를 만드는 공기 덩어리와 함께 허파에서 입술 끝에 이르는 소릿길 여행을 떠나 보자.     

 

5

    

이 짧고도 긴 여행길은 허파(폐)에서 시작된다. 가슴 좌우에 부드러운 스펀지처럼 자리 잡고 있는 허파는 가슴 속 공간 대부분을 차지한다. 잘 알다시피 허파는 단단한 갈비뼈로 둘러싸여 있다. 그만큼 인간에게 중요한 기관이다. 허파는 생명의 근원 작용인 기체 교환 기능을 담당한다. 대기 중의 산소를 몸 안으로 들이고, 몸 안의 노폐물인 이산화탄소를 몸 밖으로 배출하는 일을 한다.


우리 여정은 허파에서 출발해 목구멍과 입 안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을 따른다. 말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평소 호흡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짧은 순간에 공기를 들이마셔야 한다. 그렇게 빨아들인 공기 덩어리는 늑골 근육의 도움을 받아 적당히 반동을 하는 허파의 동작을 통해 ‘기관(氣管, windpipe)’ 쪽으로 이동한다. 기관은 소리의 원료인 공기 덩어리가 거쳐가는 길, ‘기도(氣道)’를 품고 있다.


기관으로 이동하는 공기의 양은 말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적당해야 한다. 너무 많거나 너무 적으면 원하는 소리를 내기 힘들다. 말소리를 내는 데 필요한 숨은 평소 우리가 숨 쉴 때 쓰는 양보다 3~4배 정도 많다.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쉴 때, 상대방과 보통 속도로 대화할 때, 비교적 빠른 속도로 수다를 떨 때를 비교해 보라. 가만히 앉아 숨만 쉴 때와 달리 대화나 수다 떨기 같은 말하기에서 많은 공기가 기도를 쉼 없이 오가는 걸 느낄 수 있다.

허파는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첫 번째 작업으로 풀무나 피스톤처럼 움직이는 동작을 한다. 그 반동력에 힘입어 말소리에 필요한 공기 덩어리는 기관 쪽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 ‘성문(聲門, glottis)’을 지나 ‘후두(喉頭, larynx)’에 이른다.     


6     


성문은 ‘성대(聲帶, vocal cords)’나 ‘성층(聲層, vocal folds)’으로 불리는, 탄력 있는 두 개의 근육 조직 사이를 가리킨다. 소리가 지나는 1차 관문인 셈이다. 후두는 밖에서 보면 목 앞쪽으로 도톰하게 솟아 나온 부위 안쪽에 있다. 해부학에서 ‘후골(喉骨)’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후골은 아담이 사과를 먹다가 걸린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아담의 사과(Adam's apple)’로도 불린다. 후골 안쪽 일대에는 두 개의 얇은 막인 성대가 덮고 있다. 일반적으로 후두는 이 성대를 포함하여 후골 안쪽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인다.


후두 일대에서 중요한 것은 성대다. 성대는 성문을 지나는 공기에 진동을 주거나 성문의 크기를 조절하는 구실을 한다. 이를 통해 단순한 공기가 서로 다른 성질의 여러 가지 말소리가 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구체적으로 성대는 두 근육 조직 사이의 간격을 완전히 없애-성문을 폐쇄해-기도를 오가는 공기를 차단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공기의 순환 속도나 양이 결정되고, 낱낱의 서로 다른 말소리가 만들어진다.


성대는 성문 사이의 간격을 미세하게 조정하여 빠르게 진동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공기 흐름인 기류(氣流)가 ‘웅’ 소리를 내면서 성문 사이를 재빠르게 미끄러지듯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준다. 이때 ‘웅’ 소리가 동반된 음성을 ‘유성음(有聲音, voice, 울림소리)’, 그렇지 않은 음성을 ‘무성음(無聲音, voiceless, 안울림소리)’이라고 한다. 한국어에서는 ‘ㄴ, ㄹ, ㅁ, ㅇ’ 등 자음 일부와 모음 전체가 유성음에 속한다. ‘ㄴ, ㄹ, ㅁ, ㅇ’을 제외한 나머지 자음은 무성음이다.     


7     


평소 성대는 숨을 내쉴 때 공기가 오가는 통로로 쓰인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먹을 때는 통로가 성대로 막혀 있어 음식물이 허파로 떨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김치와 함께 따뜻한 밥을 식도로 흘려 넣고 있다고 해 보자. 그 순간 어떤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으로 후두 부위의 성대 쪽으로 밥알 하나가 들어가려고 한다. 이 때문에 성대 부근에 있는 예민한 점막이 매우 민감한 자극을 받는다. 당신의 뇌는 그곳에 있는 세포 조직에 즉각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기침을 해서 후두로 떨어진 밥알을 뱉어 내시오!”


‘사래 걸렸다’는 말로 표현되는 일련의 상황이 이렇게 펼쳐진다.


성대는 진동 외에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들의 성질에 영향을 준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멋지게 낭송하고 싶다. 말소리의 높낮이를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낭송하면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두 성대 사이를 적당한 횟수로 여닫으면서 주파수의 높낮이에 다양한 변화를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높낮이 변화 과정을 ‘억양(抑揚, intonation)’이라고 한다. 보통의 남자와, 이들보다 고음(高音)을 내는 여자 사이의 차이점도 서로 다른 성대 길이와 진동수(주파수)로부터 비롯된다.


성대와 후두는 사람이 소리를 내는 데 가장 많이 활용하는 요소들 중 하나다. 성대와 후두가 쉽게 손상을 입는 까닭이다. 목을 지속적으로 많이 사용하거나 무리하게 소리를 내게 되면 예민한 성대 조직이 크게 자극을 받는다. 자극이 심하면 점막에 좁쌀 만한 크기의 작은 혹(결절)이 생기기도 한다. 목을 많이 쓰는 가수나 교사들에게서 이런 성대(후두) 결절이 자주 발생한다.     


주 1) 우리는 물리적으로 연속적인 말소리를 완전한 소리 덩어리인 음절로 분석하여 인식한다. 개구도는 그 음절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기 위해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88~1956)가 개발한 개념이다. 개구도는 0~6까지 7단계로 구성된다. 국어에서 모음 ‘ㅏ’는 ‘ㅐ’와 더불어 가장 높은 6도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저모음이다. 참고로 중모음(ㅔ, ㅚ, ㅓ, ㅗ)은 5도, 고모음(ㅣ, ㅟ, ㅡ, ㅜ)은 4도다. 자음의 개구도는 이들 모음보다 전체적으로 훨씬 낮다.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발음기관의 단면도다. 다음(Daum) 블로그(http://m.blog.daum.net/bail-young/46)에 있는 그림을 캡처해 편집했다.


작가의 이전글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납시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