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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20. 2016

아이가 ‘먼지’처럼 보였다

너희가 10대를 아느냐 (12)

1


형수(가명)는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있을 때가 많았다. 학기 초에 보고 책상 잠 경력이 꽤나 되겠다 싶었다. 고개를 깊이 파묻고 자는 모습이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그런 형수는 내가 다가가 등을 몇 번 토닥거리면 벌떡 일어났다. 미소를 지었다. 하얀 치아가 온통 드러나는 크고 환한 미소였다. 형수의 그 넉살 좋은 미소를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있다 보면 다시 엎드려 잤다.


형수는 몇몇 선생님에게 ‘찍혀’ 있었다. “형수 그놈, 한 주먹 하는 녀석이에요. 조심해야 해요.”라며 조곤조곤 말해주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1학년 때 친구와 싸움을 해서 걸린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형수에게 ‘한 주먹’을 본 적이 없다. 오며 가며 봐도 친구와 특별히 심하게 장난을 치거나 친구를 놀리는 것 같지 않았다. 나를 보면 예의 환한 미소를 지은 채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인사를 했다. 일부러 찾아와 악수를 청하는 형수는 성격 좋고 넉살 많은 소년이었다.


그 해 어느 날이었다. 형수가 다른 친구와 함께 학교 현관문 밖에 서 있었다. 종례를 마친 2학년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였다.


“형수야, 뭐하고 있어? 집에 안 가?”
“네, 선생님, 친구 기다리고 있어요.”
“친구? 누구?”
“명근(가명)이요. 방과후 수업 끝나면 함께 가려고요.”
“이제 수업 시작한 것 같은데 힘들지 않겠어?”


형수는 괜찮다고 말하며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시간 가까이 친구를 기다리면서도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형수가 ‘한 주먹’은커녕 ‘반 주먹’도 없는 아이처럼 보였다. 설령 ‘한 주먹’ 있으면 어떤가. 세상에 나름 ‘한 주먹’ 없는 사람 없다.  

   

2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기형도(1960~1989)의 시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마지막 연이다. 기형도의 시를 좋아한다. 그의 전집을 사서 꼼꼼이, 틈틈이 읽곤 했다. 그런데 왜 이 멋진 구절을 보지 못했을까.


나는, 생일을 맞은 아이들에게 손수 지은 축하 시를 지어주는 것으로 유명한 안준철(순천 효산고등학교에서 재직하다 올 초 퇴직하셨다.) 선생님을 통해 이 시구를 만났다. 그 얼마 전에 열린 어느 연수 자리에서였다.


강사로 참여하신 안 선생님은 학생을 바라보는 교사의 시선을 이렇게 설명하셨다. 학교에는 학생들을 푸른 종이로 보는 교사가 있다. 학생들을 먼지로 보는 교사가 있다. 학생이라면 전자에 해당하는 교사가 좋을 것이다. 교사는 어떨까. 학생을 푸른 종이로 보면 푸른 종이와 사는 것이고, 학생을 먼지로 보면 먼지투성이 속에서 사는 것이다!      


3     


주 선생님(가명)이 떠오른다. 어딘가 특별한 분이다. 담임을 맡으면 아이들의 전년도 담임들과 되도록 말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 교사들은 일부러라도 전년도 담임들을 찾아다닌다. 학생부와 같은 공식 자료로 보기 힘든 아이들의 ‘뒤’(?)를 캐기 위해서다.


이른바 ‘문제아’가 학급에 들어 있으면 이런 행태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 아이의 뒤를 수소문하는 데 제법 시간을 할애한다. 전년도 담임뿐 아니라 교과 담당 교사들 이야기를 두루 듣는다. 문제아들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상황에 따른 대처법을 미리 알아둠으로써 유사시 품을 덜어 두자는 나름의 합리적인(?) 계산에서다.


“난 전년도 담임이 아이들 이야기하려고 하면 먼저 자리를 피해 버려요.”
“그래요? 아이들을 더 잘 알려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얘길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렇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그러다 보면 아이들을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바라보는 일이 어려워지지 않을까요?”'


주 선생님과 차 한 잔 마시며 나누며 나눈 짤막한 대화였다. 주 선생님의 관점은 확고해 보였다. 일리가 있다. 부모들도 잘 모르는 게 커가는 자식 속이다. 일 년 동안 학급에서 만난 아이를 담임이나 교과 교사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형수가 “한 주먹 하는 녀석”이라며 내게 은근히 조언해 준 그 선생님인들 형수를 낱낱이 알고 그런 말을 했을까.


부모든 교사든 모두 각자의 관점에 따라 들어온 정보들로 아이들을 받아들인다. 내게 ‘푸른 종이’로 보이던 아이가 다른 이에게 ‘먼지’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아이 색깔이 원래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많은 교사와 부모가 그 무의미해 보이는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한다. 천 길 물 속을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고 했다. 이 자명한 진리를 망각하고 아이가 ‘푸른 종이’니 ‘먼지’니 하는 문제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어른들이 쌔고 쌨다.     


4     


수빈(가명)이가 그랬다. 솔직히 ‘먼지’처럼 보였다. 수업 몇 시간 하면서 그 생각이 점점 굳어져갔다. 수빈이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듣는 것 같았다. 수빈이에게 모둠 활동 시간은 친구와 대놓고 장난하거나 잡담하는 시간이었다.


몇 번 이야기를 했는데도 수빈이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너는 말해라. 나는 내 할 일 한다’는 식이었다. 수빈이를 ‘푸른 종이’로 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수빈이를 ‘먼지’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계속 그럴 수 없었다. 그 해 4월 초였던가. 수빈이가 다른 아이들 몇과 함께 교무실에서 벌을 서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에게 갔다. 미리 손에 쥔 조그만 초콜릿을 아이들 주머니에 살며시 넣어 주었다. “이따가 먹어.” 속삭이는 말에 수빈이와 아이들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전날 수업 시간에 늦게 들어온 수빈이가 사과를 하러 왔다. 평소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 전에 수빈이 담임 선생님에게 부탁을 해 두었다. 수빈이더러 내게 찾아가 사과 말씀을 드리라고 얘기해 달라고 말이다. 수빈이는 담임이든 누구든 누가 불러도 곧장 오지 않았다. 수빈이 담임에게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수빈이가 찾아오리란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수빈이가 찾아왔다.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토록 차갑게 굳은 표정을 짓던 ‘먼지’ 같은 아이가 아니었다. 표정이 밝은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푸른 미소를 띤 ‘푸른 종이’였다.


“수빈아, 선생님에게 사과하러 온 거야?”
“네.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수업 시간 잘 지킬 거야?”
“네.”


나는 수빈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가서 수업 준비 하라는 말에 수빈이는 인사를 꾸벅 하고 돌아섰다. 근처에 있던 수빈이 담임에게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수빈이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게 얼마나 예뻐요. 지금까지 두 달 사이 본 모습 중 제일 보기 좋은 거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수빈이 담임이 크게 미소를 지으셨다. 교무실 문을 빠져나가는 수빈이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었다.     


5     


이것만은 분명하다. 안 선생님 말처럼, 학생을 푸른 종이로 보는 교사는 푸른 종이 위에 쌓인 먼지를 없애주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먼지가 제거되어 푸른색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아이의 성장과 내적 성숙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을 먼지로 보면 교사는 먼지투성이 속에서 살게 된다. 짜증이 날 것이다. 안 선생님은 그 과정에서 감정노동을 하는 교사의 감정이 치유되지 않고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한다. 교사와 아이들 사이에 불화와 갈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단순하고 순진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다. 아이들을 ‘푸른 종이’로 볼 것인지 ‘먼지’로 볼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다. 애시당초 ‘먼지’로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막무가내의 아이들, 도대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늘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들을 보고 한가하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느냐며 반문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한 아이가 ‘먼지’로 태어났다고 해보자. 아이 잘못일까.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 생성에 어떤 개입도 하지 못했다.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태어났다. 반면 가슴 깊은 곳에 ‘푸른 종이’가 있지만 자라면서 형편 없는 ‘먼지’가 된 아이는 어떨까. 그 불행하고 안타까운 과정과 결과를 100퍼센트 아이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까.


아이들은 푸른 종이다. 먼지가 덕지덕지 앉은 회색처럼 보이는 아이들도 그 안을 잘 들여다 보면 빛나는 푸른색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 푸른색을 끄집어내는 일이 어른들이 해야 할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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