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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Sep 23. 2016

‘나쁜 놈들’이 없어지면 ‘좋은 녀석들’ 세상이 오는가

민주 시민 교육에 방해되는 몇몇 측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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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누스바움은 최근작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2016, 궁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육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교육을 위한 하나의 안을 디자인하기 이전에 우리는 학생들을 책임감 있고 민주적이며, 국내적・세계적 중요성을 띤 다채로운 이슈들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고 결정 내릴 수 있는 시민들로 만드는 방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인간 삶의 그 무엇이 평등한 존중, 법의 평등한 보호에 기초한 민주 제도의 지탱이라는 과제를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것일까? 그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형태의 권력위계 제도(hierachies)에, 심지어 더욱 나쁘게는, 특정 집단에 대한 폭력적 적대 프로젝트에 그토록 쉽게 빠지게 하는 것일까? - 마사 누스바움(2016),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궁리, 62쪽.


누스바움은 이어 무엇 때문에 다수는 소수를 중상모략하고 낙인 찍으려고 애쓰는지 물으면서, 국가와 국제 세계에 책임지는 태도를 지닌 시민 배양을 위한 교육이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 힘들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교육이, 민주주의가 계급 제도를 이길 수 있게 도와주는, 인간 성정 내의 모든 자원을 활용하여 그 싸움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 시민 교육이 타파해야 할 그 힘들이 의존하는 토양은 무엇인가. 누스바움의 논급을 그대로 빌려 표현하면,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 축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이다. 좋은 녀석의 문제를 어떤 ‘나쁜 놈들’이 죽어야 끝이 날 무엇으로 묘사하는 대중문화가 이러한 세계 인식을 부추긴다.


이들의 밑바탕에는 공통적으로 해롭고 악독한, ‘순수’에 관한 신화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의문이다. 우리에게 ‘순수한’ 사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 누스바움은, ‘우리 사회는 본디 순수하다’는 그릇된 생각은 오직 이방인을 향한 적개심을, 그리고 내국민을 향한 적개심에 대한 무감각만을 양산할 뿐이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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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바움은 자유와 평등을 향한 개인의 내면 투쟁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그는 간디를 인용해 민주 국가를 창조하는 과업에 해로운 작용을 하는 힘들인 탐욕과 적개심과 나르시스적 불안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내적 투쟁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에 대한 사색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능력과 무능력이 기이하게 결합되어 있는 인간이라는 사태에 대한, 무능력・도덕성・유한성에 대해 우리 인간이 맺는 문제적 관계에 대한, 그 어떤 지성적인 존재라도 수용하기 고통스러운 조건들을 초월하고자 하는 그런 욕망 말이다.


누스바움이 날카롭게 초점을 맞춘 인간 욕망은 수치심, 혐오감 등을 통해 배태된다. 그것들은 컴패션(compassion, 측은지심,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사회 내 특정 집단이 수치스럽고 혐오스러운 이들로 인식되면 그 집단의 구성원은 사회의 주류 집단보다 ‘아래’에 있으며, 그 집단과 매우 상이한 이들인 것처럼 사회를 오염시키는 동물인 양 취급된다. 그는 나르시시즘, 나약함, 수치심, 혐오감, 컴패션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민주적 시민 교육이 다루어야 하는 내용의 심장부에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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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바움에 따르면 교사들이 민주 시민 교육을 펼칠 때 유의해야 하는 또 다른 심리학적 이슈가 있다. 다양한 사회에서 보이는 파괴적 성향들이다. 그는 권위에 순종하는 평범한 개인들의 내면을 파헤친 스탠리 밀그램의 유명한 전기 충격 실험, 밀그램의 실험에 영감을 준 솔로몬 애시의 사회적 영향력과 압력에 관한 실험 들을 통해 그 파괴적 성향들의 치명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애시는 아주 간단한 실험을 고안했다.[아래 애시의 실험에 대해서는 로랑 베그(2013),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말하는가>, 부키, 95~98쪽을 참조함.]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맨 왼쪽 선과 같은 길이의 선을 오른쪽에 있는 1~3에서 고르라고 했다.(아래 [그림] 참조)


[그림] 솔로몬 애시의 실험


실험참가자는 자기가 말할 차례가 오기 전까지 다른 사람들(실험공모자들)의 대답을 들었다. 많은 참가자들이 집단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지 않기 위해 오답을 택했다. 74퍼센트의 참가자가 최소한 한 번 오답을 말했다. 공모자의 숫자도 영향을 주었다. 오답을 말한 사람이 한 명일 때는 오답률이 3.6퍼센트에 불과했다. 두 명일 때는 13.6퍼센트, 세 명일 때는 31.8퍼센트, 일곱 명일 때는 37퍼센트에 이르렀다. 로랑 베그는 이를 “‘다수’가 깡패다!”로 표현했다.    

 

애시의 연구는 17개 국가에서 133번이나 재연되었는데 그 결과들을 종합해보면, 개인의 정체성이 타자와 연결되어 발달하는, 소위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집단에 순응하는 비율이 개인주의 사회에서보다 더 높았다. 서유럽과 북미가 25퍼센트 수준을 보면 반면에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 남미는 평균 37퍼센트를 나타냈다. 물론 개인적 요인도 개입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집단의 영향력을 덜 받지만, 권위적 성격의 소유자는 그런 영향력에 더 많이 휘둘린다. - 로랑 베그(2013),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부키, 98쪽.     


사회심리학자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밀그램과 애시의 실험을 토대로 나치 시대에 유대인을 학살한 경찰 부대 소속 젊은 독일인들의 행동을 분석했다. 동료의 압박과 권위 집단이 이들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 컸던 나머지 유대인을 쏘지 못하고 만 이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에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누스바움은 권위 집단에의 순종과 동료 압박에 대한 순응 성향이 나르시시즘과 불안감과 수치심의 역학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동료 집단에 결속되는 사태를 좋아하는데, 이 사태는 일종의 ‘대리적 비허약성(surrogate invulnerability)’의 사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어떤 이들을 낙인 찍고 박해하는 경우, 그들은 흔히 집단의 일원으로서 그렇게 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권위에의 순종은 모든 집단생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며, 나약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지도자에 대한 신뢰는 약하기 그지없는 자아가 불안한 사태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대표적 기제이므로. - 마사 누스바움(2016), 위의 책,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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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바움에 따르면 나쁜 행동은 개인에 대한 병든 교육이나 병든 사회가 초래하는 결과만이 아니다. 특정 상황에서라면 분명히 훌륭한 사람들에게도 열리는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점에서다. 개인은 원래 불안하고 약하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특정 상황’이 더해지면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는다는 것.


첫째 ‘자신에게는 개인적으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나쁘게 행동한다.
둘째 아무도 비판적 목소리를 내지 않을 때 사람들은 나쁘게 행동한다.
셋째 자신들의 권력 행사 대상인 인간들이 비인간화되거나 비개인화되는 경우 사람들은 나쁘게 행동한다.


‘빨갱이’, ‘종북’, ‘전라도’, ‘진보 좌빨’, ‘김치녀’, ‘문제아’ 같은 말들이 있다. 지난 역사에서 주류로부터 배제되고 분리되어 부정적인 낙인찍기의 대상이 된 개인과 집단의 사례들이다. 두 갈래 길이 있다. 이들을 계속 만들어내는 사회를 위한 교육과 그런 사회를 극복할 줄 아는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 교사와 학교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 제목 커버의 배경 이미지는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애시의 실험 사진이다. <건설경제신문>(http://www.cnews.co.kr/uhtml/read.jsp?idxno=201203120915549910335&section=S1N11)에서 가져왔다. 가운데 사람이 진짜 실험참가자이고 그 양 옆에 앉은 사람이 실험공모자(틀린 대답을 하는 사람)라고 한다. 실험참가자의 혼란스러운 표정이 인간 내면의 허술한 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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