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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문 Oct 07. 2015

아버지

행운과 불운은 따로 있지 않다

둘째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때의 일이다. 담임 선생님께 편지를 쓴다고 했다. 분량 반은 자기가 쓰고 나머지 반은 엄마나 아빠가 채우기로 했단다. 엄마가 쓰면 좋겠다고 생각한 둘째는 엄마에게 부탁했고, 아내는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다고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내가 썼다. 쓰면서 깨달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배우고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내 아버지도 나를 키우면서 이런 마음이었을까?

내 고향은 경북 경주에 있는 ‘소평’이다. 섬 이름 같다. 40여가구가 있는 ‘작고 평평’한 논들이 주의를 에워싼 섬 같은 농촌마을이었다. 91년 큰 태풍으로 정말 섬이 되었다가 마을 전체가 쓸려 내려가 지금은 그 곳에 없다. 당시 평평한 평야지대가 넓어 인근 포항해병대에게 실비행 낙하산 강하 훈련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학교까지는 10리 남짓한 거리로 걸어서 다녔다. 비가 거세거나 바람이 찬 날이면 쉽지 않는 거리였으나 힘들었던 기억보다 중간에서 친구들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마다 그 계절에 맞는 놀이로 재미있게 놀았던 추억만 있다.

대개 기억이란 왜곡되고 과장되기 쉽다. 그래서 기록이 기억을 우선한다. 증인 보다는 증거가 더 강력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기억은 오래오래 생생히 남는다. 그때를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참담했던 그 사건이 그 이후의 인생을 많이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가을걷이 후 집집마다 짚단을 빼곡히 마당에 쌓아두던 시절이었다. 막 가을걷이가 끝났던 그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날은 산수가 신통치 않았고 구구단도 외우지 못했다. 나머지 공부와 청소로 혼자 늦게 돌아왔다. 신작로를 걸었다. 트럭이나 버스가 간간히 지나가면 먼지가 후폭풍처럼 일었다. 대개 논 사이의 난 달구지 길을 오게 마련인데, 그날은 선생님에 대한 것이었는지,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는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아마 친구들과 같이 놀지 못한 것에 대해 화가 났을 것이리라.

아무튼, 그 나머지 공부는 내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내가 무엇을 길에서 주운 것이다. 당시 고액권이라면 기껏 백원이나 오백원짜리 지폐까지만 보아온 나로써는 좀 더 큰 종이에 그려진 세종대왕 임금님의 온화로운 표정은 그 은혜로움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1만원 지폐가 1973년에 처음 나올 때 원래는 석굴암이 전면에 불국사가 후면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기독교에서 특정 종교를 정부가 두둔한다고 강력 반대해서 지금의 세종대왕이 들어가 있다. 아무튼,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아주 아주 큰 것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절을 다해가는 코스모스가 길가에 한들거릴 뿐이었다. 서둘렀다.

집에는 나보다 4살 많은 형이 반겨주었다. 형에게 이 엄청난 보물을 자랑했고 형은 단박에 그 가치를 알아 보았다. 우리들은 바로  1시간을 걸어 읍내로 나갔고 노련한 형은 제일먼저 보물섬이라는 잡지를 나에게 안김과 동시에 리벌버 장난감 권총을 사주었다. 형도 갖고 싶었던 것을 마음 놓고 샀음에도 돈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정의롭던 형은 그 돈의 주인은 나임을 말하며 선선히 주었다. 잘 감추어 두라는 비밀지령과 함께. 그렇게 그날의 하루는 뜻하지 않은 행운으로 행복하게 마감하는 듯 했다.

하지만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물건들에 대한 출현을 추궁했다. 그날의 자초지정이 복기되었다. 그의 손에는 지게 작대기가 들여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태는 그렇게 한번의 푸닥거리로 마감되는 듯 했다. 나머지 돈만 보이면 그 순진했던 하루의 일탈에 대한 진실은 받아들여질 양으로. 그러나 감추어 두었던 돈은 그곳에 없었다. 표시해 두었던 짚더미 그곳엔 돈은 없었다. 귀신에 홀린 듯 했다. 찾고 찾고 또 찾았지만 돈은 없었다. 사실대로 얘기했지만 증거는 없었고 내 증언은 거짓이 될 판이었다.

날은 차갑게 어두워 졌으며 지푸라기 밑단의 끝은 투박했다. 손톱 그리고 이와 이어진 손가락 상단 끝부분은 피가 흘렀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곳엔 돈은 없었다. 급기야 내 오늘의 절차적 진실을 알던 정의롭던 형은 나를 믿어주며 나섰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없었다. 그렇게 울며 계속 찾던 나는 다가오는 어둠이 고마웠다. 그러나 이내 달은 밝았고 간절히 기다리던 ‘그만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절망했다. 절망적 상태에 빠진 나는 세상 어느 누구 보다 더 불행했다. 절정의 고난이었다. 양력으로 생일이 12월 25일이었던 나는 예수를 떠올리며 울었다. 그도 나를 구원할 수 없었다. 집을 나섰다. 이 세상 가장 불행했던 9살. 그 소년은 그렇게 인생의 첫 가출을 감행했다.

어둠이 내린 한 시골의 동네에서 9살 가출소년이 갈 데는 없었다. 근처 논에 있는 짚가래 더미가 그 종착역이었으며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과 낮에 입었던 옷은 싸늘해진 늦가을 밤바람을 감당하긴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다가왔다. 아버지였다. "그만 들어가자!" 메시아 같은 그 한마디를 하고 돌아서는 아버지가 그렇게 고맙고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불합리하고 비민주적인 절차 처리에 대해 차분히 논하기에는 나는 어렸고 충분히 춥고 배 고팠다.

그 이후 나는 노력 없이 얻는 어떤 행운도 가벼이 보지 않는다. 행운과 불행은 따로 있지 않으며 항상 가까이 있음을 그 때 온 몸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덕분이다. 평생의 가치관을 심어준 초등학교 2학년을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이유다.

몇해전 추석. 아버지에게 물었다. 기억하지 못하셨다. 어색한 순간을 모면할 양으로 웃었다. 아버지도 웃으셨다.


<행운과 불운은 따로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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