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은 Aug 22. 2019

단 하나의 진짜 이미지가 보이는가

Monster by W. D. Myers

* Title: Monster

* Author: Walter Dean Myers

* Genre: Drama Fiction

* English Level: Grade 9-12 (lexile: 670L)

* Publisher: Harper Teen (1999)



소설 'Monster(몬스터)'은 흑인 청소년문학의 대가, 월터 딘 마이어스의 대표소설이다. 마이클 L. 프린츠상, 코레타 스콧 킹 상 등을 받았다. 전미도서상 최종후보(National Book Award Finalist)에 올랐다.



16세 소년 스티브는 편의점 강도 살인사건에 휘말리며 재판을 받게 된다. 폭력과 성적 학대가 가득한 감옥 속에서 낯선 공포감을 느낀다. 스티브는 생각했다. ‘재판과정을 영화로 만들어보자. 내가 겪는 상황을 영화 시나리오로 써보는 거야.’   이 책 제목이자 검사가 스티브를 부르는 이름 ‘Monster’가 영화의 제목이 된다.

스티브는 자신의 심경을 일기에 적는다. 당연히 1인칭 시점이다. 반면에 시나리오는 카메라가 전체를 조망하듯 3인칭 시점으로 상황을 전달한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이원구조는 살인사건의 진실, 나아가 스티브라는 인물의 진실을 밝히는데 효과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사실 처음에는 이런 독특한 형식 때문에 초반 몰입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법정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흥미로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스티브가 강도 살인 사건에서 죄가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소설의 큰 줄기이다. 검사의 주장대로 스티브는 범행에 의도적으로 가담했는가. 아니면 변호사의 주장대로 순진 무고한 청년일 뿐 사건과 아무 관계없는가. 피고인 제임스 킹과 스티브는 어떤 관계인가. 보보 에번스의 주장대로 스티브는 망을 봐주고 자기 몫을 챙기려 했는가. 아니면 에번스가 위증을 하고 있는 것인가. 소설의 중반을 넘을 때까지도 스티브는 억울하게 범행현장에 얽혀든 어린 흑인 소년으로만 보였다.


스티브의 변호사는 말한다.  ‘넌 어리고, 흑인에다 재판중이야. 배심원들이 무엇을 더 알아야겠어?’

(You’re young, you’re Black, and you’re on trial. What else do they need to know?)


스티브의 일기 중 7월 11일의 일기는 유독 길다. 자신이 25년간 감옥살이를 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함께 면회 온 엄마 이야기도 있었다. 엄마는 성경책을 건네주며 아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드러냈다. 하지만 엄마를 보내고 난 후 스티브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엄마는 분명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느끼고 있다. 확신이 없는 것은 바로 나다.’

(I knew she felt that I didn’t do anything wrong. It was me who wasn’t sure.)


스티브와 제임스 킹의 대화에서 중요한 단서가 숨어있지만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줄만큼은 아니다. 재판 과정을 담은 시나리오는 전체 상황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진실을 통찰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배심원의 평결을 듣고 나서도 스티브라는 인물이 과연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분명하게 알기 힘들다.


스티브 스스로도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마지막 일기에 적힌 말이다.


“하나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내 모습을 보고 싶다.”

(I want to look at myself a thousand times to look for one true image.) (p.281)


스티브의 일기가 손 글씨체로 쓰여서 일까. 스티브가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 미치도록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



작가 마이어스는 청소년기를 가장  흥미롭지만 고통스런 시기라고 말한다. 작가 자신도 문제 많은 10대 시기를 겪었다. 언어장애 때문에 학교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그런 작가에게 학교 선생님 한명이 글을 써보라고 조언해주었다. 9살 무렵 처음으로 시를 썼다. 나중에는 짧은 소설도 쓰게 되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단을 찾은 것이다. 마이어스는 단절되었던 세상과 만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작가만큼 거창하지는 않지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대학시절 사랑 때문에 아파하다 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누구나 사랑을 할 때 감성이 최고조가 되는 건가. 글쓰기라면 연애편지나 끼적이던 내가 어떻게 소설을 쓸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아무튼 나는 허무하게 끝나버린 내 사랑을 아쉬워하면 글을 썼다. 소설이 완성되면 그에게 보내 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원망스런 마음으로 시작된 글쓰기였는데 막상 다 쓰고 나니 그에게 이 글을 보낼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팠던 마음이 어느 정도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이런 힘이 있구나. 기형도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시구가 나를 위한 것 같았다.


마이어스는 힘겨운 청소년기를 겪었고 그 경험을 발판으로 청소년문학가가 되었다. 작품 활동을 하는 내내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주는 글을 쓰고 싶다고 작가는 말했다.


내가 이 소설을 청소년 시기에 읽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착한 모범생으로만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뒤늦게 철학서적을 뒤지며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기가 조금만 빨랐어도 어리석은 사랑 때문에 내 머리를 찧는 일은 없었겠지.


작가는 16세에 학교를 그만둔 것을 나중에 후회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작가는 깨달았다. 그 시기의 아이들은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라는 것을. 잘못된 것을 겪고 나서야 후회한다는 것을. 원래 그런 시기라는 것을. 어쩌면 우리 모두 스티브처럼 어리석고 무모하지만 누구나 그런 시간을 거치며 조금씩 현명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만약 사랑을 앓던 여린 소녀였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위태로운 사랑을 다시 했을까. 아니면 위험하고 상처받으니까 안전한 길을 걸어갔을까. 과거의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나는 뭐라고 말할까.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말하건 결과는 같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말처럼 그때는 원래 그런 시기니까.

그냥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시절이니까.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Where the Crawdads Sin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