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lluda Jan 30. 2020

아무래도 애인일까요?

혼스

지금 내가 어디에 와 있는 거지?
지금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날이 너무 추워서,
날이 너무 따뜻해서
가지 못했던 스키장을 드디어 갔다

지난해 캐나다 스키장의 매력에 빠져,
일 년치 회원권을 두 곳이나 미리 끊어 놓고
겨울아 어서 와라! 를 외쳤었는데
겨울 시작하자마자 한국 갔다 돌아오니 폭설에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다가 그다음은 하루도 안 빼고 계속 비가 내려 이번 겨울에는 아이 강습을 빼면 스키장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어제저녁부터 내일은 비가 와도 스키장 가는 바닥이 슬러시 눈이라도 꼭 가리라는 다짐을 베개 밑에 넣고 잤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스키장으로 출발!
다행히 오랜만에 해가 났다
잠시였지만 어제의 다짐을 실행하기엔 충분했다

스키장이 점점 가까워졌음은 바뀌고 있는 창밖 풍경이 먼저 알려주었다
비가 내리는데 눈이 쌓여 있는 모습.
자연의 역설이었다
바닥은 예상대로 슬러시 눈이었다
약간 물기를 머금은 눈이 밟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말을 걸어주는 듯한 느낌. 나쁘지 않았다
오피스에 가서 작년 패스를 교환했다
잠시 고민을 했다
스키를 탈까 말까 ᆢ
캐나다에 와서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것에는 많이 익숙해졌지만 스키를 혼자 탈 것이란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패스만 교환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눈 앞에 펼쳐진 온통 하얀 세상이
저와 함께 한 곡 추실래요? 하며 손을 내민다
거절할 수가 없다
자연의 유혹에 매우 잘 넘어가는 나를 알기에 나는 늘 차 트렁크에 온갖 장비들을 넣고 다닌다
어느새 스키부츠를 신고 있는 나를 보며 스스로 웃는다
올해 들어 처음 타는 스키였다
Seymour 스키장은 먼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스키를 타고 내려가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는 시스템이다
설질은 작년보다 좋지 않았다
눈이 많이 녹아 푸른 알몸을 드러내고 서 있는 나무들이 많았다
온통 하얀 설원을 기대했던 터라 조금은 아쉬웠지만 하얀 눈과 검푸른 나무의 조화가 한 장의 수묵화 같았다

스키 타기에 좋지 않은 날씨라는 것은
스키 타기에 편한 날이라는 뜻임을 오늘 알았다
리프트 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스키어들이 많지 않아 스키를 타고 그 어느 쪽으로 방향을 바꿔도 온통 탁 트인 설원이었다
갑자기 안개가 찾아왔다
불청객 아닌 불청객.
눈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조금은 위험했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 스키 타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안개 자욱한 산을 리프트를 타고 내려오는 그 맛.

맛있다!
혼자라도 괜찮았다
아니, 혼자여서 좋았다
이 몽환적 느낌.
구운몽의 성진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과연 현실이 맞나?
혹시 내가 잠시 양소유가 된 건 아닐까?
안개로 가리어진 세상을 한 줄에 매달려 내려오면서 혼자서 성진도 되었다가 양소유도 되었다가..
그렇게 구운몽 놀이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가야 할 시간이다
두고 오는 애인도 없는데 아쉽다
산도 애인이 되는 혼자 타는 스키.
혼스가 주는 선물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 한숨에 내가 넘어져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