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음 그러니까 있잖아

이런 단어들이 모여 만든 이야기.

by 정젤리



1.

전시를 위한 캡션 달기가 난항을 겪고 있다. 물론 순서를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생각하지 않은 내 탓이다. 나의 게으름이 곤란으로 돌아오면, 곤란의 크기와 상관없이 내가 초라해지는 기분. 결국 나는 어제의 나를 탓하면서 펜대를 좀 굴리다가 노트를 덮었다. 내가 그린 그림에 내가 이름을 다는데 이렇게나 어렵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도 짝짜꿍이 맞지 않는다. 어제 적어놓은 글자 몇 줄에 닥닥 까망칠을 하고 다시 몇 줄을 적었다. 내일의 내가 이 글을 마음에 들어해주기를 바라야지.



2.

새로운 일을 위한 준비를 몇 가지 시작했다. 작은 일이라고 하면 작지만 내게는 큰 일이라 마음 속은 이미 난리가 났다. 어떡하지와 어쩌지가 더덕더덕 붙어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시작하는 일은 언제든 이렇게 어렵다. 사실 막상 시작하고 나면 어 별 거 아니었구나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오르기 전의 계단이란 한 발짝도 대단히 무겁다. 그간에도 그럭저럭 꾸려온 것들이 있으니 앞으로도 그렇겠지. 남은 걱정들을 싹 털어 현관 앞에 두었다. 나가는 길에 버려야겠다.



3.

그러니까 - 로 시작하는 말을 하려면 무심결에 손가락을 까딱거리게 된다. 단어 뒤에 몇 가지의 단어를 붙이고 떼어 가며 말을 고른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늘어나는 공백을 나는 아 어 음 같은 말들로 채운다. 당신에게 도착하는 나의 말들은 이렇게 길고 긴 여행을 한다. 생각의 강을 건너고 마음의 은하수를 지나서 또 몇 번인가 산을 넘어서야 마침내 당신에게 닿는다.


그러니까 말이야 있잖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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