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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Sep 03. 2020

14. 감사는 매직, 겸손은 무적이다

착실히 득점해 한번에 날린 젊은 날들 ... 겸손한 사람에게 고개 숙여

 단상에 오른 그의 양복 상의 가슴엔 노란 은행잎이 꽂혀 있었다. 마치 한 송이 국화처럼, 노란 행커치프처럼. 그는 조금 일찍 도착해 교정을 거닐다 이 낙엽을 주웠다고 말했다. 송웅순. 그는 이날 모교 강당에서 열린 서울고 동문들의 음악 축제인 인왕음악제에 차기 동창회장 자격으로 참석해 스피치를 했다. 나는 인터미션에 강당 로비에서 마주친 그와 인사를 나눴다. 고교 6년 선배인 그는 법무법인 세종의 대표변호사였다. 나는 동문 멘토 자격으로 재학생 멘티와 함께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4년 전 일이다. 

 나는 고교 시절 미국에 있는 학교 선배들이 조성하는 재미동포 장학금을 받았다. 입학 당시 성적이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방송반 한답시고 방송실에서 살다시피 해 졸업 성적은 시원치 않았다. 그 시절에 ‘나도 나중에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 좀 내면 되지’ 했다. 그런데 박봉의 기자 생활을 하다 정년퇴직을 하고 보니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 모교의 동문 멘토링 프로그램에 멘토로 참여했다. 일종의 시간 기부였다. 

 그러나 좋은 취지의 이 프로그램은 나름의 한계가 있었다. 멘티를, 성적을 기준으로 선발하다 보니 정작 멘토링이 필요한 아이들이 소외됐다. 동문 멘토링 프로그램 참여가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되는 스펙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멘티 선발 과정에서 학교가 객관적인 자료인 성적을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동문 멘토링을 받지 않아도 자력으로 대학에 진학할 아이들에게 이 프로그램이 사실상 대입 가산점 격의 스펙을 제공하는 구실을 했다. 멘토링이라는 자원마저 성적 우수자들이 과점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인생은 덧없이 아름답고, 태양도 지금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오. … 추억과 회한도 또한 그 고엽과 같다는 것을····.  북풍은 그것을 차가운 망각의 밤 속으로 실어 간다오."(이브 몽탕이 부른 노래 ‘고엽’(枯葉·Autumn leaves))     

 나는 고엽을 행커치프로 활용할 줄 아는 송 선배에게 이메일을 띄웠다. 멘티를 선발하는 기존 트랙 외에 성적과 무관하게 멘티를 선발하는 트랙, 말하자면 공부 못하고 말썽도 좀 부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 2의 트랙이 있어야 한다고 적었다. 송 선배는 이 제안을 수용하는 한편 나더러 기존에 발행해 온 계간 동창회지와 더불어 새로 창간할 월간 이메일 뉴스레터의 제작을 담당할 동창회 편집인을 맡으라고 제안했다. 우리는 이렇게 의기투합해 해외의 동문들도 실시간으로 받아보는 이메일 뉴스레터(I LOVE SEOUL)를 선보였고 동문 멘토링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혁신의 초석을 놓았다.   

 법조, 방송, 영화 등 분야별로 동문 선후배가 만나 저녁식사를 하면서 좌담을 하는 ‘동문 고수와의 디너타임’은 뉴스레터의 꽃이었다. 나는 송 선배에게 뉴스레터의 창간을 주도한 만큼 동창회장으로서 유명 동문들의 섭외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선배는 마다하지 않고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출연’을 요청했고 뉴스레터의 성공이 동창회장으로서 추진하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압박’했다. 

고교 선배인 이순재씨와 인터뷰할 때 동창회장이었던 송웅순 선배(오른쪽)가 동석했다.  


 송 선배는 동창회장 재임 시 내가 쓴 멘토링 책 <너답게 살아갈 너에게-위로 아닌 직설로 응원하는 20대의 홀로서기>를, 모교 선배이기도 한 자신의 형 등에게서 경비 지원을 받아 모교 졸업생들에게 한 권씩 선물했다. 이 책엔 모교 선배 세 사람- 보수 이론가이자 경세가였던 고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송호근 포항공대 석좌교수, 유진룡 전 문화체육부 장관의 지상 멘토링이 실렸다. 앞서 이 책을 쓰기 위해 나는 40명의 명사와 인터뷰했다.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 고교생, 대학생, 취업준비생들에게서 질문과 고민거리를 취합했다. 고교생이었던 나의 동문 멘티는 이런 질문을 보내왔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성적, 그리고 대학 진학일 것입니다. 잘하는 아이들은 명문대 진학을 위해, 못하는 아이들도 자기에게 맞는 대학을 찾으면서 나름 고민하고 노력합니다. 대학은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나요?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게 성공의 지름길일까요?” 

 나는 이 질문을 당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있던 송호근 교수에게 던졌다. 그때 이 질문을 한 멘티는 졸업 후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고교 선배인 송 교수의 대학 후배이자 제자가 된 것이다.

 나는 어제 오랜 만에 송 선배와 점심을 같이했다. 피차 임기가 끝났지만 묵은 인연을 잊지 않고 먼저 연락하는 선배 덕이었다. 나는 연초에 낸 책을 한 권 들고 나갔다. 표지 안쪽에 ‘존경하는 송웅순 선배님께’라고 헌사를 적었다. 그는 내가 유일하게 이 남사스런 헌사를 스스럼없이 바치는 선배이다. 

 동창회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송 선배가 선후배들을 다독여 원만하게 문제들을 푸는 것을 지켜봤다. 이순을 넘기고도 혈기를 잘 못 다스리는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변호사에게서 한 수 배웠다”고 말했다.   

 선배가 동창회장을 퇴임할 때 뉴스레터에 싣기 위해 그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대입 예비고사에서 전국 10등 안에 들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수재였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지만 사법시험은 늦게 됐다. 늦은 나이에 사병으로 입대할 땐 열아홉에 만난 부인이 눈물로 환송했다고 한다. 등에 업힌 첫 아이는 방끗 웃으며 바이바이를 했다. 그는 이 비자발적인 노병(?) 생활이 천생 범생이인 자신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우리 나이로 서른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로펌을 거쳐 삼성그룹 법무실장을 지냈다. 그때부터 그는 수첩에 메모를 했는데 그렇게 틈틈이 적은 수첩이 해마다 10권에 이른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이런 내용이다. 

“머리로 아는 것, 가슴으로 아는 것, 근육으로 아는 것이 다 다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머리에 머무는 건 단지 지식일 뿐이고 공감을 할 때 비로소 가슴으로 알게 되죠. 그런데 스스로 근육을 움직여 행동으로 옮기는, 딱 그 만큼이 바로 나입니다.”

 그는 젊은 날 하남시 산곡동에서 고시 공부 할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버스를 타고 동네를 벗어났는데 술 취한 남자 승객 둘이 젊은 여자 차장의 뺨을 계속 때렸다. 차장이 취객에게 버스 요금을 달라고 한 게 화근이었다. 다들 못 본 척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심지어 버스 기사도 이 부당한 폭력을 외면했다. 그는 덩달아 외면한 자신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일어나 양팔로 두 남자의 머리를 감은 채 버스 계단에 주저앉았다. 젊은 날 스스로 근육을 움직여 이들을 제압해 경찰에 넘긴 행동이 늦깎이 고시생이었던 자신을 고양시켰다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2018년 1월 퇴임하는 송웅순 총동창회장에게서 공로패를 받았다. 우리는 의기투합해 월간 이메일 뉴스 레터를 창간했다.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은사들을 만났다. 숱한 선배들을 겪었다. 취재를 하느라 사회 각 분야의 내로라할 만한 인사들도 적잖이 만났다. 동창회 일 하면서 만난 한 학교 선배는 후배들 앞에서 나더러 무릎을 꿇으라고 했다. 선배의 권위로 포장해 부당하게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다. 못된 기질이 발동해 되로 받은 모욕을 말로 갚았고 그 선배가 결국 동창회 일에서 손을 뗐다. 

 조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상사에게 좀처럼 머리가 숙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은 상사에게서도 더 배우지 못했다. 원광대를 나와 군 복무 중 중앙정보부에 특채돼 중정 기조실 과장을 지낸 정문술 전 미래산업 사장은 미래산업을 창업해 2000년 국내 최초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고 이듬해 예순셋에 은퇴했다. 경영권은 직원들에게 넘겼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300억 원의 재산을 기부했다. 그 후 국민은행 이사회 의장과 KAIST 이사장을 지냈다.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그가 인터뷰 때 자식에게는 “예스맨이 돼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러지 못했다. 리더가 리더다울 땐 팔로우어십을 발휘했지만 그렇지 않을 땐 까칠하기 짝이 없었다. 한때 가까웠던 회사 선배는 그런 나를 “콩나물 팔아 카바레 간다”고 평했다. 근근이 콩나물 팔아 모은 돈을 카바레 가 탕진하듯이, 평소 착실히 득점해 쌓은 평판을 원샷 하듯 까먹는다는 것이다. 정의가 하수 같이, 공법이 물 같이 흐르는 세상을 꿈꾸더라도 그렇게 격렬하게 상사와 부딪칠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가 겸손하지 않은 탓이었다. 나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고작 평균적인 겸손에 도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말 겸손한 사람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내가 못 갖춘 겸손이기에 더 커 보이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감사는 매직이고, 겸손은 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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