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해버린 탈주하는 삶
오랜만에 설레는 아침 햇살이다. 날씨는 약간 흐렸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알람을 끄고 저절로 일어날 때까지 자고 일어났다. 정말 헐레벌떡 일을 하다가 밥도 못 먹고 삼각 김밥을 부랴부랴 사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마치 양 손에 캐리어를 끌고, 캐리어 위에는 또 다른 가방을 얹고, 백팩을 메고, 또 보조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로 길을 가다가 갑자기 모든 짐이 싹 사라져 홀가분한 몸이 된 기분이다.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보며 이 기분을 즐겼다. 오늘은 뭘 하면 좋을까? 영화를 보러 시내에 가야겠다.
영화를 예매하고, 천천히 준비해서 지하철을 타러 나갔다. 아직 장마가 끝나지 않아서 언제 비가 다시 내릴지 모르는 우중충한 날씨였다. 하지만 뭐 그게 대수인가! 나는 지금 백만 년만에 시내로 영화를 보러 가고 있는데. 출근하며 지나치던 거리를 걸었다. 커피 나올 시간을 계산해서 들어가면 바로 가지고 나올 수 있도록 사이렌 오더를 주문하고 헐레벌떡 들어가던 스타벅스, 매일 사먹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하고 먹을 시간도 마땅찮아 그냥 지나가면서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던 고로케와 만두 가게, 조금이라도 힐링을 얻으려고 습관적으로 들렀던 저가 브랜드 카페. 이 길이 이제 출근길이 아니라니. 아름답다.
시내에 가서 예전에 많이 가던 돈까스 집에 갔다. 평일 점심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영화 시작까지는 시간이 넉넉해서 천천히 돈까스를 먹었다. 20대 때 시켜먹던 대로 곱빼기를 시켰는데 배가 찢어질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30대 후반이 되니 무리인가 보다.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배가 터지도록 점심을 먹은 게 얼마만인지!
만족스러운 식사 후 영화관으로 가서 영화 '탈주'를 봤다. 오늘의 나에게 딱 맞아 떨어지는 제목이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울었다. 내가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눈물이 계속 나왔다. 험하디 험한 남으로 가는 길. 끝까지 따라붙는 추격에 선 하나만 넘으면 되는데 코 앞에서 병사는 쓰러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발버둥에 마침내 하늘이 감격한 걸까. 추격자는 돌아서고, 병사는 꿈에 그리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탈주, 탈주하는 삶.
나의 오랜 소망이자 현 상황이자 절망이다. 나는 그렇게 적극적이지도 의욕이 있는 스타일도 아니다. 용기도 없고 항상 몸을 사리는 편이다. 그래서 망설이고 주저하는 시간도 길었다. 노력이라고 해봤자 악바리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찮을 것이다. 그래도 내 성향 안에서 할 것은 다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드디어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눈 앞에서 모든 문들이 매정하게 닫히는 것을 봐 왔던 지난 날들을 지나며 동력을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다.
몇 년 전 돌았던 신조어 중 '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인 '이생망'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에게 아직 탈주할 힘이 남아 있을까. 30대 후반 나이에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데. 방황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잘못 든 길. 이걸 만회할 수 있을까. 아무리 물어도 답해줄 사람은 없다. 내가 답을 찾아야만 한다. 이미 사표를 던졌다. 탈주는 시작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좋아하는 브랜드에 가서 그동안 가지고 싶었던 리본이 잔뜩 달린 은색 가방을 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소소한 행복이다. 이 나이엔 백수가 된다고 한들 근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백수 첫 날에는 그런 근심은 하지 않기로 하자. 적어도 올 여름은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장마는 끝나가고 있다. 장마가 끝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여름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겠지. 곧 시작될 뙤약볕이 나의 겨울 같은 삶에 내리쬐기를.
아직이다. 나의 청춘은 끝나지 않았어. 찬란한 여름을 잘 붙잡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