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 힐링 장소 리스트
시간이 지날수록 재미있는 일도 점점 줄어들고 직장 일은 무료해진다. 예전에는 해보고 싶은 일들도 많았고 그런 일들을 하며 힐링을 했는데 요즘에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일도 없고 그냥 가만히 쉬는 게 제일 좋다. 사람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며 함께 시간 보내는 일은 여전히 즐겁지만, 그것도 혼자 시간 보내며 충전을 해 놓은 상태라야 즐길 수 있다.
재미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지치거나 기분이 별로거나 힐링이 필요할 때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좋아하는 음식을 사 먹는다. SNS에 뜨거나 입소문 난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익숙하고 정든 곳에서 먹던 음식을 먹는 게 편안하고 좋다. 오늘은 우리 동네에서 내가 자주 출몰하는 힐링 장소들을 기록으로 남겨보려 한다.
#1. 잠봉뵈르 카페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전에 살던 집으로 음식을 배송시켜서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가져온 적이 있다. 그때 분노 게이지가 끝까지 차오른 나에게 택시 기사님이 뜬금없이 이 카페를 가리키며 잠봉뵈르 맛집이라고 이 동네 살면 꼭 가봐야 한다고 강력 추천을 했다. 리스트에만 올려두고 있다가 어느 날 지인이 여기 맛있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처음 오게 되었다. 집에서 도보 30분 정도 걸려서 산책할 겸 걸어간다. 주변에 산이 있고 카페 안에도 정원 같은 공간이 있어서 창밖을 내다보며 잠봉뵈르와 커피를 마시면 숲 속 별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서 라디오 팟캐스트를 듣거나 글쓰기와 독서를 한다. 한 곳에서 같은 메뉴만 계속 조지는(?) 습성이 있어서 여기선 늘 루꼴라 또는 할라피뇨 잠봉뵈르, 잠봉이 들어간 감자 수프, 드립 커피를 주문한다. 서비스로 드립백 커피 하나를 주는데 모아 놓으면 직장에서 요긴하게 마실 수 있다. 주기적으로 와주지 않으면 잠봉뵈르의 뾰족한 꼭짓점이 눈에 아른거려서 잠이 오지 않는다. (이번 주말에 가야지.)
#2. 동네 가정식 백반집
생선구이 백반과 제육 백반 딱 두 가지를 파는데 나는 오로지 생선구이 외길인생이다. 평소 반찬을 사서 집밥을 차려먹다가 귀찮고 질리면 사 먹다가를 반복하는데, 계속 사 먹거나 빵 같은 걸로 대충 때울 때 위장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넣으라고 분노의 항의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무것도 먹기가 싫어지고 억지로 불량한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난다. 그럴 때 긴급 처방으로 오는 곳이 집에서 도보 3분 거리에 있는 이 한상차림 집이다. 만원인데 전에는 생선 종류도 더 있었고 반찬과 과일도 더 풍성했는데 요즘 물가가 올라서 그런지 많이 소박해졌다. 그래도 갈 때마다 메뉴가 랜덤으로 나오고 밥이나 반찬이나 국이 모자라면 더 주신다. 집에서는 굽기 싫은 생선과 1인 가구라 사면 반도 못 먹고 상해서 버려야 하는 다시마와 양배추 쌈을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좋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편안한 분위기가 나를 감싼다. 생선 굽는 냄새가 가득한 식당 창가 자리에 앉아 창 밖의 거리를 구경하면서 보리차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 여기서 밥을 먹고 나면 속도 편안해지고 기분도 좋아진다.
#3. 동네 광장 앞 버거리
해지기 전 이른 귀가를 할 때 뭔가 센치한 기분이 들면서 집으로 바로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동네 광장에 있는 버거리에 간다. 창가 자리에 앉으면 어스름한 저녁 빛 아래서 농구를 하거나 킥보드를 타거나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벤치에 앉아서 쉬는 사람들이 보인다. 탁 트인 광장을 보면 마음도 뻥 뚫리는 것 같다. 맥주를 같이 주문해서 '버맥'을 하며 광장의 나무와 분수와 사람들을 구경하면 갑자기 무료하고 허전하던 나의 주변 환경이 활기차고 매력적으로 보인다. 햄버거를 먹다 보면 어느새 어두워진다. 나와서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설렁설렁 집으로 걸어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여기서도 메뉴판은 필요 없다. 오로지 클래식 치즈버거다. 당연히 빅사이즈다.
#4. 동네 감성 카페 1
동네 번화가에서 골목으로 살짝 들어가면 이 카페가 있다. 인지도도 나름 있고 장사도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은 데 갈 때마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들어서면 온통 새하얀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 길을 향해 난 정사각형의 하얀 창문이 활짝 열려 있고, 아기자기한 커튼이 산들산들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미친 감성이다. 여기서 살고 싶다. 야외에 테라스 같은 공간도 있는데 나무가 주변을 가득 둘러싸고 있다. 2층이라서 노출되지 않는 프라이빗한 느낌도 마음에 든다. 커피도 맛있고 케이크도 맛있는데 나는 많이 달지도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은 단호박 케이크를 제일 좋아한다. 이 근처 직장에 다닐 때는 출근 전에 여기서 커피 한 잔을 하며 정신 무장을 하곤 했다. 이제는 주로 한가한 토요일 오전에 온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으며 신문을 읽으면 집중이 잘 된다.
#5. 집 주변 대형 브런치 카페
아파트와 빌라로 가득한 주택가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브런치 카페인데 2층짜리 커다란 집에 정원과 별채가 딸려있다. 커피와 빵 맛이 무난하고 브런치도 괜찮은 편이라 동네 주민들이 많이 온다. 각 구역마다 인테리어를 다르게 해서 각각의 매력이 있다. 카공족을 위한 자리도 마련해 놓아서 과제하러 온 대학생들도 많다. 오래 앉아 있어도 별로 눈치 보이지 않는 분위기라 오랫동안 죽치고 앉아 노트북 작업을 해야 하거나 글을 쓸 때 여기에 온다. 예전 직장에 다닐 땐 주말에 여기서 일하느라 거북목이 심화되어 하마터면 진짜 거북이가 될 뻔했다. 시도 때도 없이 일만 하는 게 너무 우울해서 조금이라도 기분전환을 하고자 여기 오기 시작했다. 요즘엔 브런치에 발행할 글을 쓰러 온다. 카페 옆에 빨래방도 있어서 이불 빨래를 돌려놓고 기다릴 때도 여기서 커피를 마신다. 여기선 주로 브런치 플레이트와 커피세트를 먹는데 아쉽게도 브런치가 나오자마자 이성을 잃고 흡입해 버려서 사진이 없으므로 보통 2차로 주문하는 말차 쿠키 사진으로 대신한다.
#6. 집 앞 국숫집
주말 근무를 하고 돌아오는 퇴근길에 먹으면 딱인 집 앞 국숫집 잔치국수와 땡초김밥. 자리를 잡고 앉으면 늘 텔레비전에서 불후의 명곡과 주말 가족 드라마가 나오고 있다. 본가에 가지 않으면 텔레비전을 볼 일이 없는데 여기 앉아서 가족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왠지 집에 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배고파서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하지만 이 순간을 위해서 쓸데없는 군것질도 하지 않았지. 잔치국수와 땡초김밥이 나오면 봉인 해제. 입에 마구 쓸어 넣고 국물까지 모두 들이켜면 힐링 완료다. 양도 엄청 푸짐해서 나 같은 고독한 대식가에게 최적의 장소다. 평일엔 퇴근을 늦게 하기 때문에 올 수 없고, 일요일엔 문을 열지 않아서 코앞에 있는데도 생각보다 오기 힘든 곳이다. 토요일에 일을 하거나 혼자 집콕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와야 한다. 사진 계속 보니까 침 나온다. 조만간 가야겠다.
자꾸만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 때문에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시작한 동네 투어. 처음에는 큰 기대 없이 그저 햇살이나 쬐자고 나왔지만 어느새 이 시간 덕분에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 나의 동네 투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