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박자 커피

나도 알고 싶지 않았어요.

by JEMMA

"이거 말고, 삼박자 커피로 줘."


언젠가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타 드렸는데 어떤 어른이 하신 말이다. 믹스 커피로 다시 바꿔드렸다. 그러자 "역시 삼박자 커피가 최고라니까!"라며 흡족해하신다. 삼박자 커피라니. 어딘가 아재스러운 표현이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 말이 별로 공감되지 않았다. 커피는 아메리카노지. 원래 단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특히 달아선 안 되는 음식이 있다. 예를 들면 하와이안 피자, 단호박 피자, 고구마 피자는 내 기준으로 피자가 아니다. 피자에서 느껴지는 단맛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커피도 그런 음식들 중 하나다. 커피에서 단맛이 나는 건 참을 수 없다. 나에게 커피의 범주에 드는 것은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페라테까지다. 그 외의 메뉴는 내 돈 주고 사 마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나의 일과는 출근해서 믹스 커피를 한 잔 들이켜는 것으로 시작한다. 출근하자마자 탕비실에 들어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다. 컵에 믹스 커피를 붓고 있을 때 서서히 들려오는 물 끓는 소리는 정말 설렌다. 뜨거운 물을 컵에 부으면 달달한 인스턴트커피 향이 올라온다. 홀짝홀짝 마시면서 자리로 돌아온다. 눈이 번쩍 뜨이고 몽롱하던 정신이 또렷해진다. 원두, 설탕, 프림 삼박자가 어우러져 나는 달콤 쌉싸름한 맛. 이제 삼박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왠지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 같다. 당 떨어진다는 느낌이 뭔지 이제 알아버렸다. 이젠 아메리카노의 씁쓸한 맛만으로는 일의 고단함을 날려버릴 수 없는 때가 온 것이다.


사람은 세월을 맞으며 조금씩 기력이 쇠한다. 예전 같은 혈기로 살다가는 몸이 아작 날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것들조차도 하나둘씩 내려놓기 시작한다. 이러한 체념은 생존 본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한 모금 마시면 오만상을 찌푸렸던 삼박자 커피의 그 몸서리쳐지는 단맛이 언제부턴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마침내 그 맛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A-B-C-D로 전개되어야 하는 일이 A-B-D-C로 전개될 때 솟구쳤던 그 분노는 이젠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기에 그냥 용납해 버린다. 머리카락이 떨어진 방바닥에는 가방도 안 내려놓던 내가 이제는 머리카락이 널브러진 방바닥에 그냥 훌렁 누워버린다. 싫어하는 삼겹살의 비계를 하나하나 떼어버린 후에야 살코기를 입에 넣곤 했지만 이제는 그거 뗄 시간에 한 점이라도 더 먹자며 모조리 입에 털어 넣는다. 치약을 강박적으로 밑에서부터 짜올리던 나는 언제부턴가 손에 잡히는 대로 그냥 주물럭댄 후 대충 던져놓는다. 풀메이크업을 하지 않으면 집 앞 슈퍼에도 안 나갔었지만 어느새 중요한 결혼식에 참석할 때도 컬러밤 하나로 아이섀도와 블러셔와 립스틱을 퉁치고, 언제 마지막으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마스카라는 이제 어딨는지도 모른다. 더는 그렇게 피곤하게 살지 못한다. 당 떨어진다. 세월이 더 흐르면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가방 안에 단 것들이 잔뜩 든 봉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하나씩 까먹게 되겠지.


육체의 청춘은 그렇게 저물어 간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슬퍼질 것이다. 그러나 그 슬픔 역시 결국은 인생에게 선물로 주어진 '체념' 때문에 사그라질 것이다. 또한 체념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 말을 사랑한다. 청춘. 단순히 인생 중 젊은 시절만 청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청춘은 아메리카노에서 삼박자 커피로 넘어가도 결코 저물지 않는 청춘이다. 성경에서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구절들 중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갈렙의 말이 있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팔십오 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청년의 뜨거움을 잃지 않는 삶. 영원한 청춘. 어린 시절 그 말을 너무나 사랑하여 마음에 새겼다. 그렇게 살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그게 어떻게 사는 삶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고상한 마음을 품은 것만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이 변함없이 순결하게 유지될 거라고 믿었다. 여전히 강건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감당할 수 있으니, 지금 내게 주소서. 나도 저렇게 말할 수 있기를. 나의 노년도 이토록 뜨거울 수 있기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닫게 된 것은, 나는 갈렙처럼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늙어가는 육체임에도 여전히 젊은 날과 같은 힘으로 삶을 감당해 낸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약한 존재였다. 그래서 좌절했고, 실망했고, 잊었다. 그러나 영원한 청춘이란 잊는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영원한 청춘은 알지 못하는 자의 소망도 앗아가지 않으며,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그 삶으로 인도해 간다.



이 글을 쓰면서 재밌는 것을 하나 발견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갓 직장인이 되었을 때 내가 아메리카노에 대해 쓴 글이 있었다. 일부만 인용해 본다.


그윽하면서 쓴 갈색의 물, 꼭 인생 같아서.
마실 때마다 나는 어른이 되어간다. 그래서 나는 아메리카노만 보면 두근두근 떨린다.
그러니, 오늘은 오늘의 아메리카노를 마시자. 내일은 내일의 아메리카노겠지.


갓 어른이 되어 아메리카노에 대해 글을 쓰던 내가, 이제는 불혹이 머지않은 내가 되어 삼박자 커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내일도 역시 출근해서 삼박자 커피를 마실 것이다. 이제는 어린 나의 글을 조금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오늘은 오늘의 삼박자 커피를, 내일은 내일의 삼박자 커피를!!



영원한 청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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