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사진 가득
나는 입시 학원 영어 강사다. 솔직히 교육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었고, 지금도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기보다는 어리다는 이유로 특별히 귀엽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달까. 대학 졸업 후 집안 사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년만 하고 그만둘 생각이었다. 도중에 진로 변경 도전도 했지만 실패해서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다.
지겹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남의 성적을 올리려고 그들을 구슬리고, 공부하라고 빌고, 플랜 A를 짜주고 안 지키면 플랜 B, C, D를 짜주는 일이 싫었다. 내 인생도 제대로 이끌어가고 있지 못한데 지금 남의 인생을 신경 쓸 땐가. 그렇게 생각했다. 어린애들이 청개구리처럼 내 말의 정확히 반대로 행동하고, 필터도 안 거치고 막말하는 것도 열받았다. 누군 보강을 하고 싶나. 나도 쉬고 싶다고. 누구한테 좋으라고 해주는 건데 불러낸다고 나한테 신경질을 부렸다. 먼저 예의 없게 굴면서 날 언년이 취급 해놓고, 싫은 소리 조금 하면 삐져서 잘못을 뒤집어 씌우려고 했다. 수도 없이 약속했는데 매번 배신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모든 걸 해맑게 저지르고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둘리 같은 놈들. 스펀지밥 같은 놈들. 둘리가 미워졌고 고길동이 불쌍해졌다. 스펀지밥을 붙잡아 쥐어짜고 싶었다. 징징이를 비웃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싶어졌다. 나는 어느새 그렇게 둘리의 고길동, 스펀지밥의 징징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애들은 고길동과 징징이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나 보다. 타격감이 좋아서 그런가. 애들은 내가 하라는 건 하지 않고, 약속한 건 맨날 배신 때리고, 10초 전에 한 말도 기억 못 하면서 자꾸 나에게 쿠키런을 같이 하자, 올리브영에 아이라이너를 사러 같이 가자, 피시방에 가자, 핑클 노래 불러드릴 테니 노래방에 가자, 카페에 가자, 롤을 같이 하자, 시험 점수 오르면 도시에 놀러 가자, 새로 생긴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사달라, 어른 되면 치맥을 사달라며 달라붙었다. 내가 화를 내면 해맑게 웃으면서 더 화나게 했다.
세월이 흘러 그 애들이 어른이 되었고, 나를 제끼고 시집 장가를 가는 제자들도 생겨났다. 스승의 날인지 생일날인지 어느 날에 어떤 제자가 안부 카톡을 보냈다. 이 아이가(지금은 어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교복 넥타이는 잔뜩 흐트러져서는 퇴근할 때 쫄래쫄래 따라오면서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곤 했었다. 강아지 같던 그때의 귀여운 모습을 떠올리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화기애애하고 몽글몽글한 분위기로 마무리를 하려던 차에 이 녀석이 말했다.
"이제 꽃사진을 프사로 해놓으시고, 진짜 아줌마 되시는 것 같아 속상하네요."
감성 바사삭. 아, 맞다. 잘못 기억했다. 너 강아지가 아니라 스펀지 밥이었지. 이런 수세미 같은. 오함마 이모티콘을 보내드렸다. 역시 이 스펀지 밥, 둘리 같은 놈들과 훈훈한 마무리는 불가능하다.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리며 다시 내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저번에 자연을 보며 힐링하다가 꽃이 예뻐서 찍어 놓은 사진이다. 이렇게 예쁜데. 얘가 뭘 모르네.
내가 예전에 꽃 사진을 안 찍었었나. 모르겠다.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지만 예전에 교회 강대상에 있는 꽃꽂이가 너무 예쁘다고 엄마가 자꾸 맨 앞으로 나가서 사진을 찍어오라고 해서 짜증을 낸 적이 있다. 창피해서 서둘러 대충 찍고 돌아서는데 내 뒤로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꽃꽂이 사진을 따라 찍으려고 폰을 들고 줄을 서 계셔서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때 웃겼는데. 하지만 요즘 내 핸드폰 갤러리엔 꽃과 나무 사진이 가득하다. 카페나 식당 정원에 쪼그려 앉아 꽃 사진을 찍고, 산책하다 대화를 멈추고 또 꽃 사진을 찍는다. 퇴근길에 성큼성큼 걸어가다 갑자기 멈춰 서서 길에 핀 꽃을 찍으면 지나가던 사람이 힐끔 쳐다본다.
어느 새에 세월이 이만큼 흘렀나. 이제는 전보다 세대 차이가 더 많이 나서 애들과 거리낌 없이 놀러 다니지는 못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자꾸 말 걸면 철벽 치는 스킬도 늘었고, 이젠 조금만 더 있으면 자기들 부모님 나이와 비슷한지라 세월의 아우라가 느껴지는지 예전보다 덜 달라붙는다. 진심으로 다행이다. 하지만 어느새 징그럽던 아이들이 귀엽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 이런 말 하면 내일 또 열받는 일 생기는데.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