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초롬한 날의 유레카

행복한 퇴근길 혼국타임

by JEMMA

주말 출근이다. 요즘 날씨가 오락가락하는데 오늘은 새초롬하니 꽤나 쌀쌀하다. 요즘 계속 늦게 잤더니 너무 졸린다. 이런 날에는 집콕하면서 뒹굴거려야 하는데. 떡볶이 배달시켜 먹으면서 리스트에만 올려두고 계속 못 봤던 드라마를 정주행 하고. 졸리면 낮잠 좀 자고. 아, 상상할수록 괴롭다. 어서 퇴근하고 싶어. 휴일은 그렇게 빨리 지나가면서! 퇴근을 기다리는 직딩은 시간을 들들 볶는다. 빨리 가. 빨리 가. 빨리 가.


드디어 퇴근이다. 헐레벌떡 탈출한다. 평소에는 지하철을 타지만, 오늘은 볼일이 있어 버스를 탔다. 아, 배고파. 저녁은 뭘 먹을까? 집에서 그냥 냉장고에 있는 식은 밥과 반찬을 꺼내 먹긴 싫다. 만족스러운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싶다. 깨작깨작 먹는 거 말고 뭔가 묵직한 게 땡기는데. 국밥! 국밥을 먹어야겠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집 근처 국밥집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런데 딱히 땡기는 곳이 없다. 그 식당들이 맛이 없는 건 아닌데 뭔가 가려운 곳을 정확하게 긁어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버스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여 가게들이 하나둘씩 불빛을 밝히고 있다. 이제 몇 정거장 후에 내리는데. 빨리 결정해야 해. 조바심이 나서 다리를 달달 떨다가 문득 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이 근방에 일이 있었을 때 한 번 갔던 국밥집이다. 그때 진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났다. 유레카! 불꽃이 터진다. 후다닥 벨을 눌렀다. 헐레벌떡 내려서 국밥집에 들어간다. 할머니 사장님이 맞아주신다. 오, 사람들 많다. 손님들이 모두 할아버지, 아저씨, 노부부 등 나이 드신 분들이다. 이거다. 이 노포 감성. 내가 원한 게 바로 이런 국밥집이었다.


얼큰한 맛의 돼지국밥을 주문했다. 잠시 뒤 국밥이 나왔다. 사장님은 순대 좀 먹어봐라, 싱거우면 새우젓을 넣어라 하시면서 나를 챙겨주셨다. 그러면서 수저를 아직 안 꺼냈냐며 이쁘니까 내가 꺼내준다고 하셨다. 후후후후후훗 기분 좋네? 갑자기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뚝배기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는 국을 휘휘 저어 본다. 새우젓을 좋아하는 나는 한 움큼 푸짐하게 새우젓을 넣었다. 고기가 엄청 많이 들어있다. 몇 숟가락 퍼먹다가 밥을 말았다. 그런데 밥보다 고기가 더 많은 것 같다. 아무렇게나 퍼올려도 고기가 걸린다. 나는 원래 살코기 말고 다른 수상한(?) 부위는 먹지 못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골라내는 게 너무 힘들고 귀찮아져서 그냥 입에다가 쓸어 넣다 보니 다 먹게 되었다. 그런데 이 국밥 너무 맛있다. 여길 진작 기억해놨어야 하는 건데. 정신없이 양파와 마늘까지 다 먹어치웠다. 마늘은 뚝배기가 지글지글 끓고 있을 때 국에 다 때려 넣으면 나중에 익어서 맛있다.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에 나오는 고로상이 된 기분이다. 평소에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니며 보더라도 중도하차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일단 인생작 리스트에 올리면 계속 우려먹으면서 보는 편이다. 그중 하나가 '고독한 미식가'이다. 예전에 어떤 고등학생 남자아이가 이 드라마를 열심히 보길래 대체 그게 뭐기에 그렇게 빠져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 인생 드라마라고 했다.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그때부터 나도 빠져들고 말았다. 처음엔 음식을 먹으면서 하는 독백 대사가 웃겼고 주인공이 가진 약간의 찐따미(?)와 먹고 싶은 건 언제든지 마음껏 주문할 수 있는 재력의 조화가 매력적이라 좋아하게 되었는데 세월이 지나니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신경 쓰지 않고 음식을 먹는 고고한 행위. 이 행위야말로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치유'라는 독백이 가슴 깊이 와닿는다.


퇴근 후 오로지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혼자서 음미한다. 이런저런 스몰토크도 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의 입맛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음식을 먹으면서 아무 생각 하지 않는 동시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멍을 때린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조금씩 닳은 에너지가 충전된다. 이런 힐링 목적에 맛도 분위기도 잘 들어맞는 식당을 찾으려고 하면 어려운데, 오늘처럼 강렬하게 끌리는 곳으로 홀리듯 들어오면 언제나 대성공이다.


아, 배부르다. 접시를 모두 비우고 나서야 일어섰다.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서는데 할머니 사장님이 "잘 가요, 이쁜 아가씨!"라고 뒤통수에 대고 외치셨다. 히힛. 입이 귀에 걸린다. 국밥집 리스트 남바완 추가. 단골 예약입니다.


4월에 작성한 글이라 발행 시점과 계절이 좀 안 맞는다. 그래도 맛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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